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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세익스피어-군주들(3)
군주들(3) - The Kings
II
우선 셰익스피어가 보여주는 거대한 메커니즘의 작동을 추적해보자. 극장의 프로시니엄(무대전면)에서 양쪽 군대가 싸움을 벌인다. 안쪽의 작은 무대는 하원인 평민원 (House of Commons)이나 왕의 거소로 바뀐다. 왕이 주교들에 둘러싸여 발코니에 등장한다. 나팔소리가 들린다. 이제 프로시니엄은 런던탑 정원이 되고 투옥된 왕자들이 감시를 받으며 끌려 나온다. 안쪽 무대가 감방으로 바뀐다. 왕위를 계승할 세자는 폭력의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문이 열리고, 단검을 든 청부 암살자가 등장한다. 곧 바로 프로시니엄은 런던의 밤거리로 바뀐다. 공포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정치 이야기하며 급히 지나간다. 다시 나팔소리가 들린다. 새로운 군주가 발코니에 등장한다. .<리처드 2세>에 나오는 멋진 퇴위 장면으로 시작해보자.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 여왕 생전에 출판된 판본에는 모두 삭제되었다. 권력의 손이 바뀌는 바로 그 순간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거대한 메커니즘의 작동을 너무나도 잔인하게 드러낸다. 권력은 하느님 혹은 국민들로부터 부여 받는다. 칼날의 섬광과 감시원들의 행진, 협박 당한 귀족들의 환호, 강제 소집된 군중들의 외침이 이어진다. 그리고 보라. 새로운 권력이 하느님 혹은 민중의 뜻에 따라 부여된다.후에 헨리 4세로 등극하는 헨리 볼링브로크(Henry Bolingbroke)가 추방지에서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신하들에게 버림받은 리처드 2세를 체포한다. 쿠데타가 완수된다. 그러나 아직 합법화되지 않았다. 이전의 군주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에.
리처드를 이리로 데리고 와라. 사람들이 모두 보는 자리에서
항복을 받아 내야지. 그러면 우리는 의심을 사지 않고
앞으로 나가갈 수 있지.
왕의 옷을 억지로 벗은 리처드가 감시를 받으며 등장한다. 뒤이어 국왕의 휘장을 들고 귀족들이 입장한다. 이 장면은 상원인 귀족원 (House of Lords)에서 일어난다. 프로시니엄은 리처드가 재건축하고 그 유명한 오크 나무로 천장을 짜맞춘 웨스트민스터 홀이 된다. 리처드는 딱 한 번 여기로 불려 나온다. 그것도 왕권을 넘겨주기 위하여. 왕권을 박탈 당한 왕이 말한다.
아아, 왜 나는 왕에게 불려 온 걸까
남을 통치하던 그 왕으로서 생각을
내가 떨쳐 버리기도 전에? 나는 아직도 알지 못 한다.
교묘하게 환심을 사고, 아첨을 떨고, 절하고, 또 무릎 굽히는 법을.
슬픔에게 잠시 시간을 주어 나에게 굴종이 무엇인지
가르치게 하라. 근데 난 기억하고 있지,
그들이 나에게 호의를 청한 것들을. 나의 신하들 아니었나?
언제가 나에게 "국왕폐하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 아니었나?
하지만 전 왕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왕관을 건넬 때, 그는 잠시 왕관을 손에 쥐고 있다가 헨리에게 건넨다. 마치 자신의 의지에 따라 건네주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미 권력, 지대, 수입을 포기했다. 법령과 법규도 폐지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뭐가 더 남아 있지?” 셰익스피어는 알고 있었다.
... 이제 이것을 읽는 것 말고는 더는 없습니다.
당신 자신과 추종자들이 국가와 이 땅의 번영에 반하여 저지른
과실과 중대한 범죄들을.
이 내용을 자백하시면, 사람들 마음에
당신의 폐위가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왕관을 뺏긴 왕이 말한다.
내가 그리 해야 하는가? 내가 짜놓은 어리석음을
내가 풀어야 한단 말인가? 마음씨 착한 노섬벌랜드,
만약 그대의 위법 행위가 기록된다면,
이렇게 멋진 사람들 앞에서 읽는 것이 치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도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왕위 박탈은 신속하고 완벽하게 완수되어야 한다. 왕권이 소멸되어야 한다. 새로운 왕이 기다리고 있다. 전 군주가 반역자가 아니라면, 새로운 왕은 찬탈자가 되어 버린다. 이 대목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검열을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노섬벌랜드
주군, 서둘러 주시오. 이 항목들을 읽어 주시오.
리처드
내 눈에 가득 찬 눈물. 앞이 보이지 않아.
이 짜디짠 눈물이 내 눈을 아주 멀게 하지는 않았군.
내 눈은 여기 반역자들의 무리를 볼 수 있으니.
아니지, 내 눈을 나 자신에게 돌리면,
나머지와 함께 나 자신도 반역자인걸.
왜냐하면 나는 영혼 깊이 찬성을 했지,
왕이라는 화려한 옷을 입은 몸을 발가벗기는 것에...
역사를 드라마로 쓰면서 셰익스피어는 먼저 역사를 압축한다. 역사 자체가 존 왕, 헨리 왕, 리처드 왕의 특정 드라마보다 훨씬 극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드라마는 거대한 메커니즘의 작동 속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몇 년을 한 달로, 몇 달을 하루로, 장면 하나를 서너 대사에 담아낸다. 압축된 시간이 역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왕위 박탈의 거대한 피날레 장면이다.
리처드
그러면 가게 해주시오.
볼링브로크
어디로요?
리처드
그대가 가라는 곳으로, 그대가 볼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볼링브로크
너희 중 몇이 이 분을 런던탑으로 모셔 가거라.
...
다음 수요일, 우리는 장엄한 대관식을
치를 것이오. 경들 모두 준비 하시오.
<리처드2세, 4막 1장>
거의 끝났다. 하나만 더 하면 된다.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이 행위는 새로운 비극의 첫 장이 될 것이다. 물론 제목은 <헨리 4세>로 바뀌겠지만. <리처드2세>의 볼링브로크는 원수를 응징하는 “긍정적인 영웅”이었다. 그는 유린 당한 법통을 세워 정의를 수호했다. 하지만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비극에서는 리처드 2세가 했던 역할을 하게 되리라. 순환 과정이 완성된다. 그리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된다. 볼링브로크는 역사의 거대한 계단 반쯤 올라섰다. 머리에 왕관을 쓴 것이다. 통치를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어의를 입고, 윈저궁에서 왕의 고관대작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때를 맞춰 도착한다.
노섬벌랜드
먼저, 폐하의 신성한 왕국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다음 소식은, 옥스포드, 솔즈베리, 블런트, 켄트의 머리를
런던으로 보내게 했습니다.
...
볼링브로크
퍼시경, 그대의 노고에 감사하오.
경의 가치에 합당하고 마땅한 보상이 더해질 것이오.
(피츠워터 등장)
피츠워터
폐하, 제가 옥스퍼드에서 런던으로
브로카스와 베넷 실리의 머리를 보냈습니다.
이들은 옥스퍼드에서 폐하를 전복하려던
위험한 모의를 했던 자들입니다.
볼링브로크
피츠워터 경, 그대의 노고를 잊지 않겠소.
당신의 공훈은 너무도 고귀하오. 잘 기억하리라.
<리처드2세, 5막 6장>
이 장면이 너무나 끔직한 것은 모든 행동이 아주 자연스럽고 사무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새로운 통치가 시작된다. 새로운 국왕에게 여섯 명의 목이 바쳐진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이런 식으로 비극을 끝내지 않는다. 충격이 필요하다. 거대한 메커니즘의 작동은 번쩍하는 깨달음 속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도 단 한 번, 천재의 번득이는 영감처럼 말이다. 새로운 군주는 목을 하나 더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추종자에게 살인을 지시한다. 지시한다는 말은 너무 단순하다. 왕들은 암살을 지시하지 않는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허락할 뿐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쓴 말로 돌아가보자. 이것이 반복되는 역사를 보여줄 가장 위대한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는 인간의 마음과 권력의 메커니즘, 공포, 아첨, 그리고“시스템” 등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마지막 장면에 왕은 관여하지 않고,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왕의 말만 있을 뿐이고, 그것이 메아리처럼 되울릴 뿐이다. 이 장면은 셰익스피어가 실제 현실보다 더 실제에 충실했던 장면이다.
엑스턴
왕이 하신 말씀을 알아들었는가?
'이 살아있는 두려움을 내게서 없애 줄 친구가 나에게는 없는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하인
바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엑스턴
'나에게는 친구가 없는가?' 그러셨다. 두 번씩이나.
두 번이나 다급하게 말씀하셨어. 그렇지?
하인
그러셨습니다.
<리처드 2세, 5막 4장>
<리처드2세>의 마지막 장면에는 가장 충성스런 신하가 관을 옮기는 하인들과 함께 등장한다.
위대하신 국왕이시여, 제가 이 관 속에
당신의 두려움을 넣어 바칩니다. 이 속에는 폐하의 가장 큰 적들 중에
가장 강력한 자가 숨을 잃고 누워 있습니다.
보르도의 리처드, 제가 이 자를 여기로 데리고 왔습니다.
<리처드2세, 5막 6장>
천재의 번득이는 영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왕의 대답이 어떠했는지는 생략하자. 보나마나 뻔하다. 그는 엑스턴(Exton)을 추방하고, 자신이 직접 상주가 되어 리처드의 국장을 치르도록 명령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 있다. 그것은 마치 중세 연대기처럼 무미건조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왕은 <햄릿>에서 던졌던 질문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는듯한 문장을 슬며시 흘린다. <햄릿>은 반드시 두 편의 <리처드> 작품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한다. 이 문장은 갑자기 느끼는 세상에 대한 공포와 그 잔인한 메커니즘을 표현한다. 벗어날 수도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나쁜 왕도, 좋은 왕도 없기 때문이다. 왕은 왕일 뿐이다. 그것을 현대적 용어에 대입시켜 보자. 단지 왕들의 상황만이 존재할 뿐이며, 그 시스템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상황은 선택의 자유에 대한 여지도 없다. 비극의 끝, 왕은 햄릿이 이야기했을 법한 대사를 내뱉는다.
독약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것이 좋다는 말은 아니야
<리처드2세, 5막 6장>
셰익스피어 세계는 실제 행동을 지시하는 행위의 명령(order of action)과 도덕의 명령(moral order) 사이의 모순이 있다. 이 모순이 인간 운명이다.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