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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작전명 발키리
1944년 독일 군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사망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슈타우펜베르크



슈타우펜베르크
작전명 발키리
실제인물

히틀러가 지배한 나치 독일의 대령이자, 북아프리카 전선의 육군참모와 베를린 육군본부에서 예비군 참모로 지냈다. 프로이센 귀족 출신으로 명예를 중시하는 군인이었다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실화배경 영화
작전명 발키리

한때 그는 히틀러를 '독일민족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로 존경하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폴란드 침공을 비롯한 러시아 전선, 유대인 학살 등 나치스 SS 친위대의 잔혹한 전쟁범죄를 목격하면서 충격을 받아 이때부터 '반나치주의'로 돌아섰다.
1943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크게 부상을 당해 왼쪽 눈과 오른손, 그리고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그 후 본국으로 귀환하여 요양생활을 하다 베를린에서 국방군본부에 근무하여 예비군 참모로 지냈고, 루트비히 베크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결성한 반히틀러 조직에 가담했다

실제인물과
영화속 그를 연기한
톰 크루즈

1944년 7월 15일, 볼프샨체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빌헬름 카이텔과 함께 있는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발키리 작전의 본래 목적은 연합군의 폭격이나 기타 전쟁의 예기치 못한 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시 질서를 유지하고자 각지역 국방군 본부에 있는 예비군을 출동시켜 사태를 수습하는 것으로, 일종의 계엄령같은 작전계획이었다
이 작전안은 '반나치주의자'세력들이 '히틀러 사후 정계에서 히틀러와 그의 일당 잔재들을 쓸어버리는 것'으로 비밀리에 수정해서 바꾸었다. '반나치세력'의 구체적인 계획안은 히틀러의 암살 후에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켜서 게슈타포와 나치스 SS를 무력화하고, 전군을 장악 한 뒤에 군정을 실시하고 서방 연합국에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있는 육군 본부 예비군 참모직은 히틀러에게 직접 브리핑을 할 수 있어 암살 결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보직이었다. 그는 불구가 된 장애인으로 신체 수색을 받지 않고도 히틀러에게 접근 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 종전에 있었던 여러번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했던 점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번에 틀림없이 직접 히틀러를 처치하기로 마음을 먹어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그는 계획대로 볼프샨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서 시간을 보낸 뒤 가지고 간 서류 가방 위장 시한폭탄(정확히 말하면 플라스틱 폭탄이다)을 작동시키고 회의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리고 안전한 거리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폭탄은 정확히 12시 40분경에 회의실에서 폭발하였다.

당시 위치도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가 회의실 책상 아래 놓아둔 가방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한 히틀러의 전속부관 '하인츠 브란트' 육군대령이 그 가방을 발로 더 옆으로 밀어 놓아버려 폭탄이 두꺼운 목제 테이블 다리 뒤에서 터졌다. 정확한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슈타우펜베르크는 그 사실을 몰랐고, 폭발을 보고 히틀러가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굵은 테이블 다리는 몇 미터 앞에 있는 히틀러를 보호해주었고, 히틀러는 고막이 터지고 좌반신에 화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회의실이 대파되었고, 한 명의 속기사를 포함하여 4명이 죽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쿠데타 실패 이후 사령부 현장에서 부상을 입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직후 사건과 연루될 가능성을 우려한 육군 보충군 사령관인 육군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의 독단적인 약식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육군총사령부 건물 앞뜰에서 총살형에 처해지는데, 형 집행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
(우리 성스러운 독일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