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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척



인기척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 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 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 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 이병률 시집, [어딘가로 당신은 가려 한다]에서 (70)
- 문학동네, 2판 8쇄, 2012. 7.18
:
'오만 개의' 생각이 드는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이,
'인기척이 코앞인데'
어찌 살지 않으리오.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더라도
#오늘의_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