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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영웅? 몰락한 자전거 도둑? 엄복동의 진실
필더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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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실제 엄복동, (오른쪽) <자전차왕 엄복동>의 주연배우 정지훈

개봉 전 부족한 완성도와 실화 인물을 미화했다는 논란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자전차왕 엄복동>. 일제 강점기 시대 한민족의 자존감을 살려준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는 어쩌다 도둑이라는 불명예를 지니게 되었을까? 오늘은 실제 기록된 역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인생의 빛과 어둠 모두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인간 엄복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어쩌면 영화가 다뤘어야 할 그의 진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1. 당시 자전거 대회는 어느정도 인기였나?
▲강점기 시대 자전거 영웅 엄복동의 사진

영화는 그가 경기도 평택 출신에 물장사를 하며, 아버지, 1남 1녀의 동생을 책임진 가장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 자전거 선수 이전의 엄복동에 대한 기록은 1892년 출생이라는 기록 외에 자세히 알려진 게 없다. 경기도 평택이 고향이라는 이야기는 '설'에 불과하며, 실제 태어난 곳은 서울 중구 오장동으로 되어있다. 십 대 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일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일미상회라는 자전거 가게의 점원으로 취직하게 되면서 자전거와 인연을 맺게 된다.

자전거와 마라톤은 당시 인기 스포츠였는데 가게 점원이나 배달부들이 선수로 많이 뛰었다. 특히 자전거 선수 중에는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들이 많았는데, 일하면서 자전거를 접할 기회가 많은 데다 당시 업계가 제품홍보를 위해 대회를 개최하는 일이 흔해 자연스럽게 자전거 가게 점원들이 적극적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엄복동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선수로 참여하게 된다. 그가 21세때인 1913년 개최된 전 조선 자전거 경기대회서 첫 우승을 시작한데 이어 주요대회를 내리 석권하게 되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3. 엄복동의 실력은 어느정도였나?
영화속 마지막 대회 장면의 모티브가 되었지만, 극적인 효과를 살리지 못한 그의 인생경기이다. 실화에 충실한 묘사였다면 매우 감동적인 장면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폭행 사건 이후 30세가 되던 해에 엄복동은 최순이라는 19세의 서울 출신 여인과 결혼해 1남 2녀의 자녀를 낳게 된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지만, 당시 운동선수들은 금전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1923년 5월 20일 중국 다롄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제 자전거 경주 대회가 개최되었고, 엄복동도 이 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출전 비용을 낼 수 없어 포기하려던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시민들과 만주, 연해주 지역의 동포들이 돈을 모아 그의 출전 비용을 대신 내주면서, 엄복동은 극적으로 대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다롄에 온다는 소식에 수많은 해외 동포들이 경기장에 모여들었고, 무려 5만이 넘는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서울 장충단에서 열린 자전거 대회(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그 때까지 국내서 열린 자전거 경주는 40바퀴 이상을 도는 게 규칙이었으나, 이 국제 대회는 무려 70바퀴를 돌아야만 했다. 3년 전에 당한 부상의 여파와 제대로 된 지원이나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70바퀴를 돈다는 것은 체력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은 아시아 전역에서 온 최고 기량을 지닌 프로급 선수들이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엄복동은 70바퀴가 넘는 트랙을 완주하며 기적적인 우승을 차지한다. 그의 드라마틱한 우승에 5만 관중은 열광했고, 동포들은 울고 웃고 환호하며 그의 우승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엄봉동은 그렇게 동포들의 환호 속에 금메달을 받았고, 경기가 끝나자 동포들이 그를 자동차에 태워 다롄시를 한 바퀴 도는 카퍼레이드를 개최해 수많은 시민들의 축하를 받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엄복동은 이때의 우승으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자전거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7. 실제 그는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했었나?
이후 엄복동은 1926년 35세의 나이로 자전거 선수 생활을 은퇴하게 되고 그 해 7월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엄복동은 이효진이라는 자전거 도둑과 손을 잡고, 부천 시내의 자전거 수십대를 훔쳐 되파는 도둑질을 시작하고 만다. 당시 자전거 1대는 쌀 수십 가마니 수준에 공무원 월급보다 3배 이상 비싼 고가였기에 피해액은 엄청났다. 이는 결국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불러오게 되었고, 얼마 안 가 경찰에 붙잡힌 그는 징역 1년 6개월에 벌금 50원(오늘날 500만 원 수준) 판결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의 국민적 인기가 여전했던 탓에 여러 번 자전거 대회에 초청되었고, 1932년 40세의 나이로 선수로 복귀해 당당히 우승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가 여기 까지 였다면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말년에 가난으로부터 기인한 인생의 어둠에 다시 한 번 굴복하고 말았다.
▲러지사의 1928년 자전거 'No. 26 Gentleman’s Standard Roadster'

시간이 흘러 해방 이후인 1950년, 61세의 노인이 된 엄복동은 이제 모두에게 잊혀진 영웅이 되고 말았다. 생활은 전보다 더 궁핍해져, 하루 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 우연히 시내를 지나가다 당시로써는 매우 고가인 자전거 한 대가 문전에 놓인 걸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는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훔치게 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 빠르지 못했던 그는 시민들의 추격으로 금방 붙잡히게 되고, 경찰서에 인계되어 곧바로 서울지검에 송치된다. 이 두 번째 절도 사건은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검사의 배려로 30일 기소유예로 마무리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엄복동의 명성은 추락할 데로 추락해 결국 '자전거 도둑'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살게 되었다.

이후 엄복동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집 없이 동두천과 의정부시 일대를 떠돌다 자취를 감추게 된다. 6.25 전쟁중이었던 1951년 동두천의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한 때 조선인들의 자존심이자 아시아의 자전거 영웅이었던 엄복동. 그 삶의 마지막 엔딩은 가난과 대중의 무관심으로 너무도 안타까운 결말로 마감되고 말았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잊혀진 국민영웅 - 동양 자전거 대왕 엄복동 (스포츠 둥지 2014년 3월 19일. 신승환(해군사관학교 교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두 바퀴로 민족의 희망을 쏘아 올린 ‘자전거 왕 엄복동’

네이버 지식백과 - 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자전거 왕 엄복동사진=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 온라인 커뮤니티2019.03.01 '카카오 1boon'에 제공된 콘텐츠입니다.오타 신고/제보 및 보도자료damovie2019@gmail.com※ 저작권자 ⓒ 필 더 무비.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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