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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봐도 난 좀 특이해' 지독한 솔플러 이야기


오늘 RPG극장에서 만나볼 미로빛(닉네임) 님이 그렇다.
저는 제가 생각해도 좀 특이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집에 인터넷이 안 되다보니 CD게임을 많이 했어요.
특히 '디지몬월드'는 CD가 닳도록 플레이했죠.



그는 최종 보스를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충분히 됐는데도 불구하고 '게임을 끝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클리어하지 않고 콘텐츠를 즐겼다고 회상한다. 이런 플레이 방식이 나중에도 게임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온라인RPG를 할 때도 렙업에 재미를 느끼지 못 하는 편이에요. 오히려 내가 캐릭터가 되어서 그 세계를 살아가는 재미로 한달까요. 파티플레이를 하면 이런 재미가 반감됩니다.

이러한 게임 취향은 미로빛을 '솔플러'로 만들어놓았다. 파티를 하면 스토리를 스킵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다른 유저가 보스를 잡아버리면 몰입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온라인RPG를 선택할 땐 크게 3가지를 본다. '스토리가 좋은지', '자유도가 높은지', '솔플이 가능한지' 여부다.
친구가 디아블로2를 하자고 해서 당연히 액트 1부터 시작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버스방을 가는 거예요. 컬쳐쇼크를 받았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고레벨 유저가 퀘스트 클리어를 도와주는 '버스'가 당연시됐다. 버스를 타면 방금 만든 캐릭터라도 고레벨 던전(시크리트 카우 레벨)에 입장할 수 있었고 순식간에 레벨업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로빛에게 디아블로2는 '스토리 따라 바알 잡으면 끝나는 게임'에 불과했다. 스토리를 전부 건너뛰어야 하는 버스는 당연히 못할 일이었다.
제 취향은 마비노기였던 것 같아요.
자유도 높고 스토리 있고. 혼자 해도 즐길 거리 많고.

다소 번거로운 부분이 있었다면 '달인작'이었다. 달인작은 스킬 숙련도를 올리기 위한 일종의 노가다인데, 필수는 아니지만 솔플로 스토리 진행을 하기 위해선 필요하다고 느꼈다.
당시 보스 '글라스 기브넨'을 공략하기 위한 적정 인원은 3명이었다. 당연히 미로빛은 파티가 아닌 혼자 잡고 싶었고 이는 훨씬 높은 스펙을 요구했다. 그렇게 치를 떠는(?) 노가다가 시작됐다.
제가 키웠던 엘프가 몸이 약하거든요. 자칫하면 바로 죽어요. 엘프 단신으로 도전하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좀 멍청하다 할 수도 있겠는데 이제는 오기가 생겨서 도전하는 중입니다.

물론 이후에도 글라스 기브넨을 잡기 위해 서너 번 복귀했지만 아직도 진전되지 못 한 상태다. '눈 한번 딱 감고 파티해볼까'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는 완고했다.
가장 최근에 도전해본 게 벌써 2년 전 일이라고 한다. 이제 쿨타임이 찼으니(?) 한 번 더 도전해볼 예정이시라고. 이쯤 되면 솔플에 대한 그의 집념은 특이함을 넘어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스포어'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록스'라는 세력이 정말 나쁜 놈처럼 보이는 거예요. 밑도 끝도 없이 '이 녀석들을 멸망시켜야겠다' 생각을 했죠.


이때 우주에는 은하를 지배하는 '그록스'라는 세력이 있었다. 그록스는 귀중한 정보를 독점해 은하를 지배하고 있었고 원래 공략법은 '그록스를 피해서 지나가야'했다. 하지만 게임에 감정이입해버린 미로빛 입장에서 그록스는 반드시 '정의구현을 해야 할' 대상이었다.

'너무 이상하다'싶어서 찾아봤더니 '그록스는 수 천개의 항성계를 가진 세력'이었다는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고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셈이다.
스토리는 반드시 혼자 힘으로 클리어해야하고 공략도 봐선 안 된다. 이러한 자신만의 룰은 가끔씩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NPC위에 떠있는 노란색 느낌표 있잖아요. 그걸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

"크리스마스땐 위쳐3를 했는데 길을 가다 느낌표가 보이는 거예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덜컥 받았는데 저보다 훨씬 레벨 높은 도적들이 나타나더라고요. 죽어버렸죠 뭐. 이런 식이다 보니까 14시간 정도 했는데 레벨이 아직도 7이에요."
어째서 그가 크리스마스에 위쳐3를 14시간이나 했는지는 넘어가도록 하자.
파티는 싫어하는데 다 같이 동일선상에서 1부터 시작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같이 하는 친구도 저처럼 이 게임 세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태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접속해서 보니 친구의 레벨이 자신보다 높아진 경우가 있다. 그가 없을 때 친구 혼자 게임을 진행한 경우다. 이럴 땐 보통 '레벨 높네? 나 퀘스트 좀 도와줘'하는 반응이 일반적이겠지만 미로빛은 다르다.
자연스럽게 '파티 전용 캐릭터'는 버려지고 '솔플 전용 캐릭터'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의 파티 전용 캐릭터는 대부분 10~20레벨에서 멈춰있는 상태다. 요즘 친구들과는 항상 동일선상에서 시작하는 롤과 배그를즐긴다고 한다.
던파를 하는 친구에게 '노가다는 좀 질리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렇긴 한데 스타나 롤같은 게임은 남는 게 없잖아'라고요.
'아 저런 관점도 있구나' 싶었죠.

자동으로 사냥하고 끊임없이 다른 유저와 경쟁을 해야 하는 모바일RPG는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캐릭터를 수집하고 조각을 모아 합성하는 일 자체가 감정이입을 방해한다.'며 '캐릭터 일러스트 밑에 대사가 나열되는 방식도 몰입감이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그렇다고 자신과 다른 취향을 무시하진 않는다. 성장과 파밍에 초점이 맞춰진 RPG를 즐기는 유저를 보면 '그냥 성향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즐기는 데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RPG는 '또 다른 나'가 되는 재미라고 생각해요. 요새는 배틀그라운드나 전략 게임을 주로 즐기지만 스트레스없이 즐기기엔 '솔플 RPG'만한 게 없습니다.

반면 미로빛은 '만렙을 포기'하고 시작한다. 그 순간 자신이 게임의 주체가 되고 자유로운 주인공이 된다. 그가 솔플을 고집하는 이유는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RPG를 좋아할까?
어쩐지 그런 고민에 빠지게 한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