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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봐도 난 좀 특이해' 지독한 솔플러 이야기
네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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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온라인RPG에서 '솔플'을 고집하는 이유로는 '혼자가 편해서', '다른 사람으로 인해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아서'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혼족'등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성향이 강해지는 추세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다소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솔플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RPG극장에서 만나볼 미로빛(닉네임) 님이 그렇다.

저는 제가 생각해도 좀 특이한 것 같아요.

본인이 생각해도 자기는 좀 특이하다고 말하는 그에게선 확실히 범상치 않은 오라가 풍겨져 나왔다. 대체 어떤 플레이 성향을 가지고 있길래 스스로 특이하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어렸을 때 집에 인터넷이 안 되다보니 CD게임을 많이 했어요.
특히 '디지몬월드'는 CD가 닳도록 플레이했죠.

미로빛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게임 '디지몬월드'
요즘이야 유치원생도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시대지만 미로빛의 어린 시절엔 인터넷이 귀했다. 집에 인터넷이 없다 보니 CD게임을 주로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디지몬월드'라는 게임을 가장 많이 즐겼다고 한다.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
처음엔 없던 건물들이 점점 늘어나는 재미도 있었다고.
디지몬월드는 단순히 디지몬을 성장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투기장, 훈련장, 식당, 미니게임 등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었다. 당시 게임치고는 자유도가 매우 높은 셈이었다. 

그는 최종 보스를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충분히 됐는데도 불구하고 '게임을 끝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클리어하지 않고 콘텐츠를 즐겼다고 회상한다. 이런 플레이 방식이 나중에도 게임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온라인RPG를 할 때도 렙업에 재미를 느끼지 못 하는 편이에요. 오히려 내가 캐릭터가 되어서 그 세계를 살아가는 재미로 한달까요. 파티플레이를 하면 이런 재미가 반감됩니다.

어둠의 전설 같은 게임을 즐기기도 했지만 '당시 할 게임이 없어서'였다고 회상했다.
디지몬월드의 영향을 받은 미로빛은 '게임 클리어'보다는 '게임 콘텐츠', '레벨링'보다는 '감정이입',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게 됐다. 반복되는 콘텐츠는 질색한다. 말 그대로 내가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가상 세계를 즐겼다.

이러한 게임 취향은 미로빛을 '솔플러'로 만들어놓았다. 파티를 하면 스토리를 스킵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다른 유저가 보스를 잡아버리면 몰입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온라인RPG를 선택할 땐 크게 3가지를 본다. '스토리가 좋은지', '자유도가 높은지', '솔플이 가능한지' 여부다.

친구가 디아블로2를 하자고 해서 당연히 액트 1부터 시작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버스방을 가는 거예요. 컬쳐쇼크를 받았죠.

전투와 파밍이 메인 콘텐츠였던 디아블로2는 취향과 멀었다.
예를 들어 디아블로2는 빠르게 헬 난이도까지 클리어하고 반복 사냥을 통해 레벨업을 한다. 그리고 또다시 보스 몬스터를 반복적으로 잡아 아이템을 파밍을 즐긴다. 다양한 캐릭터를 키우면서 스킬 트리를 구상하고 아이템을 모으는 일 자체가 콘텐츠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고레벨 유저가 퀘스트 클리어를 도와주는 '버스'가 당연시됐다. 버스를 타면 방금 만든 캐릭터라도 고레벨 던전(시크리트 카우 레벨)에 입장할 수 있었고 순식간에 레벨업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로빛에게 디아블로2는 '스토리 따라 바알 잡으면 끝나는 게임'에 불과했다. 스토리를 전부 건너뛰어야 하는 버스는 당연히 못할 일이었다.

제 취향은 마비노기였던 것 같아요.
자유도 높고 스토리 있고. 혼자 해도 즐길 거리 많고.

3명이서 공략해야하는 마비노기의 글라스 기브넨. 최초 클리어자가 화제가 될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한다.
그의 취향과 가까운 온라인RPG는 디아블로2보다는 마비노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옛날 마비노기는 굳이 서둘러서 레벨업할 필요도 없었고 남들과 비교할 일도 없었다. 디지몬월드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할 일도 많고 스토리도 있다.

다소 번거로운 부분이 있었다면 '달인작'이었다. 달인작은 스킬 숙련도를 올리기 위한 일종의 노가다인데, 필수는 아니지만 솔플로 스토리 진행을 하기 위해선 필요하다고 느꼈다.

당시 보스 '글라스 기브넨'을 공략하기 위한 적정 인원은 3명이었다. 당연히 미로빛은 파티가 아닌 혼자 잡고 싶었고 이는 훨씬 높은 스펙을 요구했다. 그렇게 치를 떠는(?) 노가다가 시작됐다.

제가 키웠던 엘프가 몸이 약하거든요. 자칫하면 바로 죽어요. 엘프 단신으로 도전하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좀 멍청하다 할 수도 있겠는데 이제는 오기가 생겨서 도전하는 중입니다.

안 그래도 허약한 엘프인데 솔플이라니
파티용 던전을 혼자서 부딪힌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며칠 동안 진득하게 달인작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퀘스트를 포기한 그는 다른 콘텐츠를 조금 즐기다가 마비노기를 접고 말았다. 

물론 이후에도 글라스 기브넨을 잡기 위해 서너 번 복귀했지만 아직도 진전되지 못 한 상태다. '눈 한번 딱 감고 파티해볼까'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는 완고했다.

가장 최근에 도전해본 게 벌써 2년 전 일이라고 한다. 이제 쿨타임이 찼으니(?) 한 번 더 도전해볼 예정이시라고. 이쯤 되면 솔플에 대한 그의 집념은 특이함을 넘어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미로빛이 꾸준히 플레이 중인 소녀전선. 스토리 모드에선 아무리 힘들어도 친구 찬스를 쓰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그가 가장 최근에 즐겼던 모바일게임 '소녀전선'에서 스테이지를 진행하면 보통 친구의 부대를 데려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미로빛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처음 진행하는 스토리는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클리어해야한다고 한다.

'스포어'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록스'라는 세력이 정말 나쁜 놈처럼 보이는 거예요. 밑도 끝도 없이 '이 녀석들을 멸망시켜야겠다' 생각을 했죠.

게임을 진행할 때마다 장르가 변하는 게임 스포어.
스포어의 은하.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해 플레이한다.
한편 공략을 보지 않고 플레이하다가 피를 본 경험도 있다. 예를 들어 '스포어'는 캐릭터가 진화할 때마다 장르가 변하는 게임인데, 처음엔 RPG처럼 캐릭터를 성장시키다가 최종적으론 우주라는 오픈월드에서 다른 외계인과 전쟁을 벌이거나 무역을 하게 된다.

이때 우주에는 은하를 지배하는 '그록스'라는 세력이 있었다. 그록스는 귀중한 정보를 독점해 은하를 지배하고 있었고 원래 공략법은 '그록스를 피해서 지나가야'했다. 하지만 게임에 감정이입해버린 미로빛 입장에서 그록스는 반드시 '정의구현을 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록스를 피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게 '그록스를 멸망시키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록스의 행성을 하나씩 정복해나갔다. 3~4일간 밥만 먹고 그록스를 토벌했는데 어째선지 상황은 그대로였다.

'너무 이상하다'싶어서 찾아봤더니 '그록스는 수 천개의 항성계를 가진 세력'이었다는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고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셈이다.

스토리는 반드시 혼자 힘으로 클리어해야하고 공략도 봐선 안 된다. 이러한 자신만의 룰은 가끔씩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NPC위에 떠있는 노란색 느낌표 있잖아요. 그걸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리가 있나. 무기가 깨진 상태지만 서브퀘스트는 해야 한다.
게임 속 캐릭터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미로빛은 아무리 사소한 퀘스트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퀘스트는 게임 속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레벨업 속도 자체가 매우 느린 편이고 만렙을 찍은 게임도 적다. 

"크리스마스땐 위쳐3를 했는데 길을 가다 느낌표가 보이는 거예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덜컥 받았는데 저보다 훨씬 레벨 높은 도적들이 나타나더라고요. 죽어버렸죠 뭐. 이런 식이다 보니까 14시간 정도 했는데 레벨이 아직도 7이에요."

어째서 그가 크리스마스에 위쳐3를 14시간이나 했는지는 넘어가도록 하자.

파티는 싫어하는데 다 같이 동일선상에서 1부터 시작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같이 하는 친구도 저처럼 이 게임 세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태니까요.

언젠가 다시 친구들과 '켠왕'을 달리고 싶다고.
친구와 온라인RPG를 할 땐 아예 '전용 캐릭터'를 만든다. 같이 레벨 1부터 시작해서 '디아블로를 잡자', '블레이드앤소울 1막 깨자'는 식으로 목표를 정해놓고 달린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또 흥미로운 스토리가 업데이트되면 같이 해보자는 식으로 의기투합한다. 

그런데 나중에 접속해서 보니 친구의 레벨이 자신보다 높아진 경우가 있다. 그가 없을 때 친구 혼자 게임을 진행한 경우다. 이럴 땐 보통 '레벨 높네? 나 퀘스트 좀 도와줘'하는 반응이 일반적이겠지만 미로빛은 다르다.

자연스럽게 '파티 전용 캐릭터'는 버려지고 '솔플 전용 캐릭터'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의 파티 전용 캐릭터는 대부분 10~20레벨에서 멈춰있는 상태다. 요즘 친구들과는 항상 동일선상에서 시작하는 롤과 배그를즐긴다고 한다.

던파를 하는 친구에게 '노가다는 좀 질리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렇긴 한데 스타나 롤같은 게임은 남는 게 없잖아'라고요.

'아 저런 관점도 있구나' 싶었죠.

모바일RPG는 자동사냥이 기본이다보니 거의 하지 않는다고.
요즘 유행하는 자동사냥 모바일RPG를 몇 개 설치해보기도 했다. 대다수가 그의 스마트폰에서 이틀 이상 남아있지 못 했다. 그나마 친구들과 함께 했던 세븐나이츠는 한 달 정도 버텼다고(?) 한다.

자동으로 사냥하고 끊임없이 다른 유저와 경쟁을 해야 하는 모바일RPG는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캐릭터를 수집하고 조각을 모아 합성하는 일 자체가 감정이입을 방해한다.'며 '캐릭터 일러스트 밑에 대사가 나열되는 방식도 몰입감이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그렇다고 자신과 다른 취향을 무시하진 않는다. 성장과 파밍에 초점이 맞춰진 RPG를 즐기는 유저를 보면 '그냥 성향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즐기는 데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RPG는 '또 다른 나'가 되는 재미라고 생각해요. 요새는 배틀그라운드나 전략 게임을 주로 즐기지만 스트레스없이 즐기기엔 '솔플 RPG'만한 게 없습니다.

주인공이 내가 된다!
온라인RPG를 시작하면 보통 만렙을 찍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또 만렙 콘텐츠가 무엇이 있는지 등을 파악하고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결과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셈이다.

반면 미로빛은 '만렙을 포기'하고 시작한다. 그 순간 자신이 게임의 주체가 되고 자유로운 주인공이 된다. 그가 솔플을 고집하는 이유는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RPG를 좋아할까?
어쩐지 그런 고민에 빠지게 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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