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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화 전 대법관, 재판 신뢰 회복 위해 충실한 심리 강조
아주경제
32년간 재판을 해온 박정화 법무법인(유) 율촌 고문에게도 낯선 순간이었다. 법대 밖에서 직접 만난 당사자는 판결문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법원이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도 억울함이 쉽게 가시지는 않았다. 박 고문은 당황하면서도 자신이 변호사로서 해야 할 일을 발견했다고 했다.
박 고문은 지난달 30일 아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재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면 당사자가 충분히 말하고 설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건을 얼마나 빨리 처리하느냐와 함께 그 과정에서 당사자 이야기를 얼마나 충실히 듣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 고문은 지난달 율촌에 합류했다.
그는 1991년 법관 생활을 시작해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와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을 거쳐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퇴임 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강의하고, 개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판단의 대상이었던 사건을 의뢰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됐다.
법원 안팎에서 보는 증거에 대한 의미부터 차이가 있었다. 당사자는 자신이 제출한 자료가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믿지만 법원은 법적 요건을 입증할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문서에 적힌 내용과 당사자가 기억하는 문서 작성 당시 사정 사이에도 간극이 있다.
박 고문은 "법원이 증거를 배척할 때 그 이유를 구구절절 쓰지 않는 것이 판결문 작성 형식이자 관행"이라며 당사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장에 대해서는 판결문에서도 적절히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판 지연 역시 법원 밖에서 보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기다림은 길어졌는데 정작 법정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는 호소였다.
그는 "실질적으로 당사자들이 다투는 변론시간은 오히려 줄고, 기일이 지정되지 않은 채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았다"고 언급했다.
최근 상담한 당사자는 항소심에서 증인과 감정에 관한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변론이 끝났다며 "2심을 도둑맞았다"고까지 표현했다고 한다. 박 고문은 개별 사건의 사정을 떠나 이런 말에 담긴 절차에 대한 실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는 "당사자에게 어느 정도 절차적인 만족감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충실한 심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당사자들은 판결에 승복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해법으로는 사실심 판사 확충을 꼽았다. 사실관계와 증거를 다루는 1·2심에서 충분히 심리하고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야 상급심에서 다시 다투려는 부담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박 고문은 "대법관 증원은 어느 정도 재판 지연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하급심 판결이 충실하고 당사자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법관 개인의 희생에 기대 사건을 처리하던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도 분명했다. 그는 재판이 지연되는 배경으로 코로나19 이후 누적된 사건과 업무량, 일과 가정의 양립을 중시하는 사회 변화 등을 함께 짚었다.
그러면서 "판사들이 나태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취지는 아니다. 판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일과 가정의 양립은 따라가야 할 흐름이고, 결국 사건은 많은데 인원이 적다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사법 개혁을 평가하는 기준도 당사자 삶에 뒀다. 권리 구제를 위한 제도라도 재판이 길어지고 비용이 늘어나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다.
그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당사자는 돈이 없어 소송도 못 한다는 자괴감을 가질 수 있다"며 "승소하더라도 들인 비용에 비해 결과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어느 경우에나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박 고문이 법관 시절 보람을 느꼈던 순간도 구체적인 사람의 사정과 맞닿아 있었다. 서울행정법원에서 노동·난민 사건을 맡았을 때가 그랬다. 부당 해고를 다투는 근로자, 고국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호소하는 난민 신청자의 사정을 법 테두리 안에서 살폈다.
그는 당시를 "그동안 걸어온 법관의 길에서 소신과 가치관을 펼칠 수 있었던 시기"로 기억했다.
대법관으로서는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불허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사건을 떠올렸다.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입법으로는 보호받기 어려운 소수자의 권리를 법 해석을 통해 살피는 일에 의미를 뒀다.
물론 구제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법리를 찾지 못했던 사건들이었다.
박 고문은 "이 사람을 구제해주고 싶은데, 현재 법을 아무리 해석해도 부족한 경우가 있다"며 "몇 달을 고민해도 이론이 나오지 않을 때 좌절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런 경험은 인공지능(AI) 시대에도 법률가에게 남아야 할 역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판례 검색과 정형적인 사건의 문서 작성 등에는 AI를 활용할 수 있지만 기존의 답을 그대로 적용해도 되는지 묻는 일은 사람이 끝까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사건, 가치 판단이나 이익 충돌, 판례 변경이 필요한 사건은 끝까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고민을 깊게 하려면 대법관 구성도 다양해져야 한다고 봤다. 실제 합의 과정에서는 같은 기록을 읽고도 서로 다른 문제를 발견했고, 논의를 거쳐 처음의 의견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박 고문은 "사람은 통상 자기 경험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다"며 "보수와 진보,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전부 결이 다르고 사건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성별과 세대, 법조 경력과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판단할 때 더 넓게 살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그는 율촌에서 상고심 사건을 중심으로 의뢰인을 돕고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 변호사 등과 상담에 참여하고 쟁점을 공유하며 서면 작성 과정에도 관여한다.
개인 변호사로 일하면서 느꼈던 업무의 한계가 합류를 고민한 출발점이었다. 강석훈 율촌 대표에게 들은 '가치성장·정도경영' 방침과 함께 일했던 판사 출신 변호사들 모습도 선택에 영향을 줬다.
그는 "함께 근무했던 변호사들이 행복해 보였다"며 구성원 간 믿음과 화합이 있어야 정도경영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직 대법관의 로펌행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알고 있었다. 박 고문은 이름만 제공하는 고문에 머무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제 인생에도 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전관의 영향력을 기대하는 의뢰인에게는 그런 이유로 결론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30여 년을 법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고는 스스로 힘이 든다"고 말했다.
판단하는 자리에서 조력하는 자리로 옮겼지만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도록 힘을 보탠다는 목표는 같다고 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다만 결과만으로 의뢰인과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설령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의뢰인과 소통해 위로를 주고 싶습니다. 그동안 추구해 온 가치나 삶의 방향이 한결같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