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읽음
임진왜란 김해 사충신, 곽재우보다 앞선 첫 의병 저항 기록
데일리안
0
임진왜란에서 의병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이름은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붉은 옷을 입고 낙동강을 누비던 홍의장군으로 불린 곽재우가 대표적이다. 그런 곽재우보다 사흘 앞서서 경상도 김해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김해 출신의 유생 송빈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에 의해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튿날에는 동래성마저 무너졌다. 정발과 송상현이 각각 부산진성과 동래성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관군의 조직적 방어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일본군의 북상은 빠르고 거침없었다. 김해는 그 진격로의 한가운데 놓인 도시였다. 부산과 동래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김해에 닿았을 때, 관에 소속된 군인이 아니라 향촌의 유생들이 먼저 움직였다. 송빈은 같은 유생인 이대형·김득기·유식 등과 함께 장정 수백 명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관직도 없고 병권도 없는 자들이 스스로 성벽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부사 서예원을 도와 중군을 맡겠다고 자청했다.

이때 성으로 달려간 이들 가운데 김득기의 사정은 유독 눈에 밟힌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까지 지낸 인물이었지만,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낙향해 지내던 참이었다.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병든 아내의 수발과 조상의 제사를 어린 아들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이 죽어 시신을 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스스로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잘라 그것으로 미리 장례를 치르게 한 뒤에야 김해성으로 달려갔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이미 각오한 걸음이었다.
성에 들어간 이들의 각오는 김해부사 서예원을 향한 꾸짖음에서도 드러난다. 왜적의 기세에 놀란 서예원이 몰래 성을 빠져나가려 하자, 송빈은 이대형·김득기와 함께 그를 가로막고 "나라를 지키라는 명을 받은 신하가 보국의 마음도 없이 몸을 사리어 처자나 지키려 한다"며 크게 꾸짖었다고 전해진다. 벼슬 없는 유생이 관의 최고 책임자를 면전에서 질책한 셈이다. 하지만 그 꾸짖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뒤 서예원은 결국 강창에서 배를 타고 달아났다.

4월 17일 왜군의 한 부대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정규군도 감당하기 힘든 규모였다. 그날 밤 송빈은 오히려 성 밖으로 기습에 나서 수백 명을 죽이고 죽도까지 적을 밀어붙였다. 수성전이 아니라 공세로 맞선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전세는 완전히 달라졌다. 대규모 왜군이 밀려들었고, 초계군수 이유검이 서문을 지키다 먼저 달아났다. 그리고 성의 최고 책임자였던 부사 서예원마저 강창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도망쳤다. 지휘 체계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빨리 무너진 것이다. 그때 성안에 남은 것은 관직도 없는 유생들과 그들이 모은 장정들뿐이었다. 그들이 도망친 부사와 군수 뒤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남았다. 의병만으로 성을 사수하겠다고 맹세했다. 4월 19일 하루 종일 혈전이 이어졌다. 그날 밤 왜군은 주변 들판의 보리를 베어 성 아래 쌓고 참호를 메워 성벽을 타고 넘어왔다. 4월 20일, 중과부적으로 성이 무너졌다. 왜군이 투항을 권유했지만 송빈은 이를 꾸짖고 남은 의병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하다 전사했다. 이대형·김득기·유식도 함께 죽었다. 장정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4월 17일에서 20일까지 나흘. 그것이 김해성이 버틴 시간이었다. 관군이 지키던 부산과 동래가 각각 하루 만에 무너진 것에 비하면, 지휘관도 없이 유생들이 조직한 저항이 나흘을 버텨낸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저항이었다. 하지만 송빈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전투 당시 조정은 이미 피란 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경상도 남단의 세세한 전투 상황까지 파악할 여력이 없었다. 살아남은 부하 양업손이 시체 더미 속에서 기어 나와 당시의 참상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 싸움은 아예 기록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관직 없이 죽은 사람들은 쉽게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양업손의 전언이 조정에 닿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쟁이 완전히 평정된 뒤인 1600년인 선조 33년이 되어서야 나라는 이들의 공을 뒤늦게 인정했다. 송빈은 이조참판에, 이대형과 김득기는 호조참판에, 유식은 이조참판에 각각 추증되었다. 벼슬 없이 죽은 유생들에게 사후에나마 관직이 내려진 것이다. 1784년에는 송빈·이대형·김득기를 모시는 송담서원이 세워졌고, 여기에 유식까지 더해져 지금의 사충신 배향 체계가 완성되었다.

이들을 기리는 공간의 역사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1871년 고종의 명으로 세워진 사충단은 본래 김해시 동상동 일대에 있었으나, 1977년 도시계획으로 자리를 한 차례 옮겨야 했다.1990년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되어 비로소 공식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벼슬 없이 죽은 이들의 흔적조차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떠돌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정명섭 작가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