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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능한 사랑, 취재 윤리와 타인에 대한 이해의 고찰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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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다’라는 표현이 있다. 별도 ‘따고’, 가을이니까 감도 ‘따겠지만’, 그보다 나에게 더 익숙한 건 ‘멘트를 딴다’라는 문장이다. 언론계 일반에서는 인터뷰도 ‘딴다’는 표현을 쓰고, 방송 스케치를 두고 ‘그림을 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따다’는 ‘붙어 있는 것을 잡아 떼다’라는 뜻이다. 멘트도 인터뷰도 그림도 결국 타인이나 공간에 붙어 있는 것을 ‘잡아 떼다’라는 뜻이었음을 이제사 유추해본다. 사람에게 붙이기에는 굉장히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기사 쓰는 일을 하는 ‘업자’의 입장에서 종종 써왔고 자주 들었다.

영화 ‘가능한 사랑’을 봤다. 누가 봐도 2009년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SP중공업 이야기를 그린 극영화다. 영화에는 해고 노동자인 호석(설경구)과 아내 미옥(전도연), 그리고 이들 그림과 목소리를 따려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자산가인 남편 상우(조인성)가 등장한다. ‘가능한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얘기란 무궁무진할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적인 진압, 복귀 여부로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린 그네들의 삶, 졸지에 죽었으되 살아있는 이와 이후의 삶을 사는 가족들까지. 그러나 많은 언론계 동료들이 증언하듯,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영화가 자꾸 취재 윤리에 관한 것으로 보였다. 미옥과 호석을 보는 예지의 눈이 빛날 때마다(정확히는 ‘딸 만한’ 장면을 발견한 그의 눈을 볼 때마다), 비슷한 자리에서 섰던 내 모습을 반추하게 됐다.
영화에는 이를 둘러싼 여러 삐걱거림이 계속해서 나온다.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다투는 미옥과 호석에 예지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날아드는 호석의 호통, 상우를 간신히 달래 저녁 자리를 만들고서는 미옥에게는 상우가 바란 자리라고 말하는 예지, 그렇게 만들어진 서먹한 저녁 자리에서 예지가 대뜸 “이년아” 하며 미옥에게 친밀함을 과시하듯 욕지거리를 하는 것, 해고 노동자를 촬영하며 눈에 튀는 비싼 옷을 입은 예지를 지적하는 미옥까지… 미옥과 호석, 예지와 상우 사이는 계급 차가 두드러지지만, 별개로 살아간다면 별 일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예지가 자신의 다큐를 위해, 무람없이 미옥·호석에 틈입하려는 데서 문제는 발생한다.

사실 어딜 가나 취재하는 사람들은 좀 튄다. 끊임없이 묻고 답을 이끌어 내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인터뷰를 딴다’라는 말이 마냥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딴다’라는 말에 담긴 도구적, 기능적 뉘앙스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이것이 ‘일’이라는 자각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간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라고 한들 취재는 어디까지나 나의 필요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렇기에 상대는 내 물음에 응할 의무가 없다. 인터뷰이, 취재원과 아무리 격의 없이 친해진들 결국 그의 삶과 말을 편집해 세상에 내놓는 사람은 ‘나’다. 친하다고 마냥 우호적으로만 재현할 수도 없는 게, 그것이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남의 삶을 편집하고 재현하는 일이 갖는 원초적인 폭력성과 그러한 일을 하는 자로서의 위치성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나는 중요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타인에 대한 불가해와 사랑의 불가능을 논하는 듯 보이는 ‘가능한 사랑’은 뜻밖에 영화 바깥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남보라 한국일보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영화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최성국·설경애’는 호석과 미옥 캐릭터의 모티프가 된 실존 인물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인 최씨는 16년 전 아내 설씨와 함께 이창동 감독을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극 중에서 호석이 경찰에게 맞는 장면은 최씨의 경험을 재현한 것이며, 호석과 미옥이 학창 시절 고향에서 만난 오랜 연인이라는 설정 또한 성국·경애 부부의 삶에서 길어왔다. 최씨는 끝내 복직하지 못했고, 현재는 건강이 악화돼 일을 못하고 있다. VIP 시사회에 참석한 설씨는 “영화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며 이 감독에게 감사함을 표했단다.

[관련 기사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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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책 ‘소설가의 일’에 김연수 작가가 적은 말이다. 비슷하게 나는 감히 가능을 가늠하지도 말고, 애초에 불가하다는 마음으로 접근하자고 생각한다. 그래야 노력을 할 것이고, 그래도 결과적으론 ‘가능할까 말까’이기 때문이다. 가끔 역지사지로 인터뷰를 ‘당할 때’ 여실히 느끼는 감정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불가하기 때문에 최대한의 노력과 조심, 나의 펜과 카메라가 지닌 폭력성과 ‘따는 사람’이라는 위치성에 대한 자각이 절실하다. 그런 자각의 열심이 드러난 게 ‘가능한 사랑’이고, 그래서 설씨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 아닐까. 그래도 영화가 보여주는 가능에의 희망이, ‘따는 사람’으로 계속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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