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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 원칙
미디어오늘
1974년 7~8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한국 인권 문제 청문회가 열렸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전체주의적 통제를 이유로 경제·군사 원조 삭감 여론이 커지자 박정희는 그해 8월23일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했다. 그해 가을, 대학에선 유신 독재에 반대하던 학생과 민주화 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관련 구속자 석방 운동이 시작됐고, 이 무렵 정권은 상류층 여성들의 보석 밀매 사건마저 기사로 쓰지 못하게 막았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는 이렇게 회고했다. 영화 속 김재환 동성일보 사회부장(박해일 분)은 송건호 편집국장을 떠올리게 한다.
“특권층 여성들이 보석을 밀수했으며 이것이 적발되어 MBC 방송에 한번 나가 버렸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당국도 당황해 이를 보도 관제하려고 했다. 논리는 이러했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면 대한민국 고관들이 극도로 부패되어 있다고 판단, 북괴의 남침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언론은 법률 외적 통제를 받아 거의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기관원이 무상출입하여 일상적으로 신문 제작에 압력을 가했으며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기사를 썼을 경우에는 ‘임의동행’이라는 형식으로 연행하여 조사 위협했으며, 걸핏하면 기자들에게 폭행을 가해 공포에 떨게 했다.”
1974년 9월23일 신부 300여명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고, 26일 명동성당에선 2000여명의 성직자와 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무효화, 국민 기본권 보장,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무렵 청년 학생이 연행되고 민주화 운동가들이 사형선고를 받아도 최후진술은 물론, 변호인 변론 내용조차 신문에 나가지 못했다. 젊은 기자들이 구속자 가족의 호소를 듣고 기사를 써도 휴지통으로 가기 일쑤였다. 결국 동아일보 기자들은 10월21일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위해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를 개편하고 노조와 협의해 10월24일을 결행의 날로 잡다. 마침 10월23일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이 연행됐다. 송건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간부가 연행되자 기자들은 간부들이 돌아올 때까지 귀가하지 않고 편집국에 대기하며 저항하기로 했다. 그리고 10월24일 오전 9시19분, 동아일보 편집국에 기자 180여명이 모였다. 당시 한국은 ‘유엔의날’인 10월24일을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었고, 덕분에 취재 기자들이 출입처 대신 편집국에 모였다. 오전 9시30분, 기자협회 분회장인 장윤환 기자의 신호로 몇몇 기자들이 편집국 한 가운데 있던 사회부장 자리 앞으로 나섰다. 장 기자는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자총회 개회’를 선언했다. 아래는 자유언론실천선언문 전문.

우리는 오늘날 우리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기자들은 기자총회 관련 기사와 자유언론실천선언문 전문을 1면에 실으려 했다. 경영진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기자들은 신문 제작에 나서지 않겠다며 맞섰다. 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이어서 낮 12시에는 윤전기를 돌려야 했다. 12시간의 제작 거부 투쟁 결과 결국 25일 새벽에서야 신문을 제작했다. 그리고 24일자 1면에 「동아일보 기자 일동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사를 담았다. 이어 「본사 편집국장 등/정보부서 조사」 기사도 실었다. 파장은 컸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선언 이후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섰다. 다음날에는 경향신문을 비롯해 31개 언론사로 퍼졌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주 김상만은 1975년 3월 8일부터 ‘경영난’을 이유로 자유언론 투쟁에 앞장선 기자들을 해고했다. 기자들은 “경비 절감을 위해 직원 전원의 봉급을 인하하자”고 나섰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신문 방송 잡지 실무 제작진의 절반이 넘는 165명이 제작 거부와 사내 농성에 돌입했고, 송건호 편집국장은 사주에게 사태 수습을 촉구하며 사표를 냈다. 그리고 농성 6일째였던 3월17일 새벽 3시, 괴한 200여 명이 용접기와 해머, 각목 등을 들고 농성장으로 난입해 기자들을 두들겨 팼다.

이 사건 이후 132명이 해직과 무기 정직을 당했다. 거리로 내몰린 언론인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고 신문사 밖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동아투위는 1978년 1월1일자 ‘동아투위소식’을 통해 제도언론이라 불러온 기성 매체들을 “권력의 주구, 민중의 배신자, 민족의 반역자”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언론 노동 운동의 구심점이었고, 한국 사회 언론자유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송건호 편집국장은 훗날 1988년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74년 말부터 중앙정보부가 동아일보 광고주들에게 광고를 해약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이를 통해 동아 사주를 굴복시켜 언론인의 해직 등 언론탄압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1975년 동아투위 사태 이후 33년 만에 군사독재 정권의 언론탄압 문제를 최초로 공식 규명한 순간이었다. 동아일보는 해직사태에 대해 지금껏 제대로 사과한 적 없으며, 해직 언론인들은 끝내 동아일보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이들은 2014년 자유언론실천재단 출범을 주도했다. 재단은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일을 기념해 매년 10월24일을 ‘자유언론의 날’이란 이름의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줄 것을 이재명 정부에 요청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