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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 관료의 가을, 신산업정책과 국가 설계의 시간
아주경제
올해는 더욱 그렇다. 특히 산업통상 관료들에게 2026년 가을은 예년과 다르다. 문득 일본 작가 시로야마 사부로(城山三郎)의 소설 「관료들의 여름」이 떠오른다. 197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고도성장기 일본 통산성 관료들을 그렸다. 자동차와 전자, 철강과 석유화학 같은 새 산업이 커가던 시절이었다. 어떤 산업을 키우고, 외국 자본에 어떻게 대응하며,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관료들은 정치권·재계와, 때로는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다퉜다. 그들 손에 들린 것은 행정서류였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리고 있던 것은 일본 산업의 미래 지도였다. 반세기가 흘러 이제 무대는 한국이다. 반세기 전 일본에 ‘통산 관료들의 여름’이 있었다면, 2026년 한국에는 ‘산업통상 관료들의 가을’이 있다.
산업정책이 돌아왔다
이 이야기가 관료사회의 고생담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세계경제의 판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선진국 경제정책에서 ‘산업정책’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산업은 시장이 고르고, 정부는 경쟁 환경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미·중 전략경쟁, 코로나19가 드러낸 공급망의 취약성, 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반도체 전쟁, 그리고 AI 혁명이 한꺼번에 겹쳤다. 반도체를 어느 나라에서 생산하는가, 배터리 공급망을 누가 쥐는가,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을 어디서 끌어오는가가 경제 문제인 동시에 국가안보 문제가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 흐름을 ‘산업정책의 귀환’으로 규정한다. 2023년 한 해에만 세계적으로 2500건이 넘는 산업정책 개입이 집계됐고, 미국·중국·유럽연합이 신규 조치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정책 목표도 기업 경쟁력 강화를 넘어 기후 대응, 공급망 회복력, 경제안보로 넓어지고 있다. IMF는 2020년 전후를 구조적 전환점으로 보는데, 이후의 산업정책은 지정학적 경쟁의 성격을 한층 강하게 띤다.
세계는 바야흐로 ‘글로벌 신산업정책의 시대’에 들어섰다. 과거의 산업정책이 특정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이었다면, 신산업정책은 기술과 산업, 통상과 안보, 에너지와 지역, 인재와 자본을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묶는다. 반도체 정책이 곧 공급망 정책이고, AI 정책이 곧 전력 정책이며, 데이터센터 정책이 곧 지역 정책이다. 산업정책의 문법 자체가 바뀌고 있다.
세 개의 거대한 실험을 동시에 시작한 한국
이런 변화 속에서 이재명 정부는 야심 찬 국가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띄웠다. AI를 새 성장동력으로 삼는 AI 대전환, 수도권 일극 체제를 바꾸겠다는 5극3특 구상, 그리고 이를 지역의 산업과 일자리로 구체화할 3대 메가프로젝트다. 이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해내기도 쉽지 않다. AI 대전환은 반도체·데이터·GPU·전력·인재·제조업을 한 줄로 꿰어야 한다. 5극3특은 산업입지와 기업투자, 대학과 연구개발, 교통망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지역 성장은 중앙정부 예산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지방정부와 기업이 움직이고 사람이 옮겨 와야 한다.
그리고 세 프로젝트가 만나는 교차로에 산업통상 행정이 있다. 산업통상부의 2026년 예산만 보아도 방향은 뚜렷하다. 산업 전반의 AX 확산에 1조1347억원, 5극3특 균형성장에 8835억원이 편성됐다. AI 팩토리, 지역혁신클러스터, 산업단지, RE100 산단, 공급망 안정이 한 부처의 정책 영역 안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사업의 개수가 아니다. 세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진짜 위험은 세 전략이 서로 다른 정책으로 따로 굴러가는 것이다. AI 따로, 지역 따로, 산업단지 따로, 에너지 따로, 인재 양성 따로 움직이면 아무리 큰 예산을 쏟아부어도 국가의 힘은 흩어진다. 산업통상 관료들에게 이번 가을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산을 따는 관료에서 국가를 설계하는 관료로
그렇다면 이들에게 무엇을 주문해야 하는가. 가장 쉬운 주문은 “더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무책임한 주문이기도 하다. 이미 밤을 새우는 사람에게 한 시간 더 일하라고 해서 산업경쟁력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증가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변화다.
첫째, 사업이 아니라 미션으로 일해야 한다. AI 팩토리 몇 개, 산업단지 몇 곳, 지역 R&D 몇 건이 최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정 지역을 AI 제조혁신의 세계적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면, 반도체와 AI, 전력과 산업단지, 대학과 기업, 중앙과 지방의 사업을 모두 그 목표 아래 묶어야 한다.
둘째, 산업부가 모든 것을 직접 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산업정책 시대의 핵심 역량은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연결하는 능력이다. 과학기술·국토·재정 부처, 지방정부, 기업, 대학을 하나의 판 위에 올려야 한다. 산업통상 관료는 정책의 생산자에서 국가 프로젝트의 오케스트레이터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거대한 청사진 못지않게 작은 성공을 쌓아야 한다. 5극3특의 성패를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AI 대전환도 몇 년 만에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과 기업이 기다려 줄 수 있으려면 중간중간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하다. 어느 지역 산업단지가 AI 팩토리로 바뀌었고, 어느 지방도시에 AI 기업과 연구인력이 모이기 시작했으며, 어느 제조기업이 AI 도입으로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소식이 하나씩 쌓여야 정책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결국 2026년 산업통상 관료에게 필요한 것은 정책을 하나 더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흩어진 정책 열 개를 하나의 결과로 묶어내는 능력이다.
산업정책의 귀환은 관료 역량의 시험대
경계할 점도 있다. 산업정책이 돌아왔다고 해서 정부가 언제나 시장보다 현명하다는 뜻은 아니다. IMF 역시 산업정책의 효과는 설계와 집행에 따라 크게 갈리며, 재정 부담과 자원배분 왜곡, 국가 간 보조금 경쟁이라는 위험이 따른다고 경고한다. 산업정책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신산업정책 시대에는 관료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 무엇을 지원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어느 기술을 국가전략기술로 삼고 어느 기술을 시장에 맡길 것인가. 수도권과 지역을 어떻게 잇고, 기업의 요구와 국민의 세금 사이에서 어디까지 지원할 것인가. 이 판단은 결국 사람이 내려야 한다. AI 시대라 해도 국가전략의 마지막 결정을 AI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좋은 산업정책과 나쁜 산업정책을 가르는 것은 정책의 이름이 아니라 그것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역량인 경우가 많다. 「관료들의 여름」이 반세기가 지나도록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가을이 지나간 뒤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한국 사회는 관료에게 유난히 엄격하다. 정책이 실패하면 무능을 질책하고, 규제가 생기면 관료주의를 비판한다. 부처 칸막이와 복지부동, 책임 회피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필요한 비판이다. 그러나 한번쯤 되물을 필요도 있다. 우리는 국가적 난제를 맡겨 놓은 사람들에게 책임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숫자를 고치고 설명자료를 만들고 국회를 뛰어다니다 보면 10월이 가고 11월이 가고 어느새 12월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루는 것은 예산서의 숫자만이 아니다. 어느 지역에 어떤 산업을 심을지, AI 시대에 한국 제조업을 어디로 이끌지, 반도체와 배터리와 에너지의 공급망을 어떻게 지킬지, 수도권과 지역을 어떻게 다시 이을지가 그 숫자 속에 들어 있다. 더 크게 보면, 글로벌 신산업정책 경쟁에서 대한민국이 차지할 자리가 그들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미국도, 중국도, 유럽도 국가의 산업역량을 다시 동원하고 있다. 이 시대에 한국에 필요한 것은 시장을 대신하는 국가가 아니다. 시장과 기업이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미래를 함께 설계하고, 필요한 곳에서 위험을 나누며, 성공하면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유능한 국가다. 그 국가를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관료다.
이번 가을은 유난히 길고 힘들 것이다. 국정감사와 예산심의가 끝난다고 그들의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진짜 실행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질책과 주문만이 아니라 격려의 말도 보내고 싶다. 숫자 뒤에 산업을 보고, 산업 뒤에 지역을 보고, 지역 뒤에 사람을 보기 바란다. 부처의 사업을 지키는 관료를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관료가 되어 주기 바란다.
우리 사회도 그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실패에는 책임을 묻되 도전에는 기회를 주고, 잘못된 정책은 비판하되 제대로 된 성과에는 박수를 보내야 한다.
훗날 한국 산업사를 돌아볼 때 2026년 가을이 이렇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이 다시 산업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한 가을, 그리고 그 최전선에서 뛰었던 산업통상 관료들의 가을이었다고.
필자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