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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암 극복 후 시니어 모델 된 장형진 씨의 두 얼굴
투데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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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완벽한 날들] 초상편은 인물의 심연을 포착해 온 서대호 사진작가와 함께 암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과 그 안의 내밀한 이야기를 기록한다. 사진은 두 장의 연작 초상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암을 진단받고 치료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복합적인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기억의 원형’을 재현한 얼굴이다. 두 번째는 질병 이후 달라진 삶을 지나며 새롭게 발견한 자신, 그리고 렌즈를 통해 비로소 마주하게 된 온전한 ‘자기다움’을 담은 현재의 얼굴이다. 상실과 불안뿐 아니라 새롭게 발견한 생의 기쁨과 지향, 관계와 삶의 태도까지 계속 확장되는 ‘나’의 모습을 조명한다. 두 장의 초상을 통해 각자가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전하고자 한다.

푸른 하늘을 가르던 스튜어디스의 유니폼을 벗어두고 선택한 결혼, 그리고 두 딸을 키워내며 보낸 세월 속에서 장형진(57) 씨의 이름 석 자는 어느새 ‘엄마’라는 이름 뒤로 밀려나 있었다. 이후 기숙사 주방에서 다른 사람들의 끼니를 책임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움직이고 하루를 빈틈없이 채워야 마음이 놓일 만큼 쉼 없이 살아왔다.

그렇게 멈추는 법을 모르고 살아온 장씨에게 찾아온 ‘설암(혀암)’은 가혹했다. 혀의 일부를 절제하면서 예전과 같은 목소리를 잃었고 또렷하던 발음마저 무너져 내렸다. 세상과의 소통마저 끊겨버린 것 같았던 절망의 문턱. 그러나 그는 주저앉아 침묵 속으로 숨어드는 대신 생애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서투른 발음 뒤로 여전히 유쾌한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여유, 그리고 굽히지 않는 우아함으로 시니어 모델이라는 새로운 런웨이에 오른 장씨. 암은 그가 품은 고유한 빛깔과 삶의 당당한 걸음걸이까지 빼앗지는 못했다.

기억의 초상 침묵의 틈새에서 건져 올린 또 다른 얼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한 발 내딛는 것보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덜 무서웠던 것 같아요.”

장씨의 삶은 늘 분주했다. 누군가의 하루를 챙기고 끼니를 만들며, 해야 할 일들로 일상을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멈춰 서기보다는 바쁘게 움직이는 쪽이 익숙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 여겼다.

갑작스레 찾아온 설암은 그런 그의 삶을 일순간 멈춰 세웠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이에게 처음 마주한 멈춤은 짙은 두려움이었다. 당연하게 이어오던 말과 식사, 일상의 감각마저 낯설어졌다. 익숙했던 목소리는 달라졌고, 무심코 누리던 것들은 애써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됐다. 이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났고, 발음이 뭉개져 단어가 입안에서 겉돌 때마다 세상과의 거리 또한 아득히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 본 적 없던 그 멈춤의 자리에서, 장씨는 뜻밖에도 낯선 얼굴 하나를 마주했다. 가족을 돌보는 사람도, 누군가의 일상을 책임지는 사람도 아닌, 짊어졌던 모든 이름을 내려놓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었다. 너무 오래 뒤로 미뤄둬 희미해졌던 마음과 늘 다음으로 유예했던 자신의 시간도 그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해방의 초상

나를 안아줄 때,

비로소 시작된 나의 무대
“이제는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서고 싶은 무대라면 한번 서보자는 마음이에요.”

멈춰 선 시간 끝에서 자신을 오래 들여다본 장씨는 비로소 삶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돌려놓았다. 이제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먼저 묻고 그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한 걸음씩 움직였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실패가 두려워 주저하기보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흘려보낼 시간들이 더 아쉬웠을 뿐이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망설였을 선택 앞에서도 한 번쯤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올라선 곳이 시니어 모델의 런웨이였다. 오랜 세월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채 이름조차 붙여주지 못했던 소망을 비로소 조심스레 꺼내 올린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내, 가족과 일을 챙기느라 늘 분주했던 사람이 아니라 오롯이 ‘장형진’이라는 고유한 존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 런웨이에 오른 순간, 낯설지만 벅찬 해방감이 번져왔다.

남이 정해준 무대가 아닌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달라진 몸으로 다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 지금 장씨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삶의 후반전에서 시작된 그 걸음은 가장 깊은 애정을 담아 온전히 자기 자신을 향해 뻗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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