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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암 딛고 모델 된 장형진, 암 이후 발견한 쉼표
투데이신문
시작은 잘 낫지 않는 구내염이었다. 혀에 조그맣게 생긴 상처가 유난히 아팠다. 구내염에 좋다는 약을 사서 발라보고 관리에도 신경을 썼다. 그러다 통 낫지 않기에 동네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기도 했다. 치료를 받으면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구내염이 올라왔다. 작았던 통증이 점점 커지자 장형진(57)씨는 결국 큰 병원을 예약해 찾아갔다.
구내염 하나를 두고 여러 차례 조직검사를 거쳤다. 낫지 않는 상처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큰 병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담당 의사 역시 처음에는 다른 질환을 의심했다. 일주일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에 병원에 찾아갔다. 설암이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2024년 7월 말, 의료대란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의사는 혀에 생긴 종양을 절제한 뒤 다른 조직을 이식하는 수술이 필요하지만 이 병원에서는 수술할 수 없다고 했다. 수술이 가능한 다른 병원을 빨리 찾아야 했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해결해야 할 일만 한꺼번에 늘어난 기분이었다. 다른 병원의 진료는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수술 날짜는 잡을 수 있을지 걱정됐다. 수술을 받게 된다면 지금 하던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도 생각해야 했다. 슬프거나 절망스럽기보다 불안했다. 두 딸도 떠올랐다. ‘이걸 애들한테 어떻게 얘기하지.’
진단에서 수술까지는 약 3주가 걸렸다. 수술 날짜가 잡힌 뒤에도 장씨는 기숙사 주방에 출근했다. 다른 사람들의 끼니를 만들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암 환자가 됐다는 사실보다 수술 전에 무엇을 끝내놓아야 하는지가 더 급했다.
병원에 들어가 수술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내가 이제 암 환자구나.’

장씨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불편했다. 하루를 빈틈없이 채워야 마음이 놓였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집을 정리한 뒤 8시에 출근했다.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끼니를 만들다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저녁을 챙겨 먹었다.
잠들기 전에는 다음 날을 미리 계획했다. 몇 시에 일어나 무엇부터 할지 머릿속으로 순서를 짰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계획대로 움직였고 일정이 틀어지면 다시 계획을 맞췄다.
“바쁘게 안 지내면 좀 불안했어요.”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며 하루를 채우는 것이 익숙했던 삶이었다. 기숙사 주방에서 일하기 전에는 쿠킹 클래스를 열어 음식을 가르치거나 매장을 직접 열어 도시락과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수술만 잘 받으면 두세 달 뒤에는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치료를 마치고 나면 다시 이전처럼 바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수술은 멈추는 법을 몰랐던 장씨의 삶을 오랫동안 멈춰 세웠다.
막막하다|먹는 일을 잃어버린 요리사
수술은 생각보다 컸다. 혀에 생긴 종양을 절제하고 다른 부위의 조직을 떼어 이식했다. 전이 가능성 때문에 목 주변도 넓게 절제했다.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해 불편할 것이라는 의사의 설명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수술 후 물 한 모금도 편히 삼킬 수 없었다. 8~9일이 지나서야 조금씩 물을 마셔봤지만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기도를 열어놓은 상태라 잘못 삼키면 위험했다. 음식을 입안에서 움직이고 삼키는 일도 어려웠다. 평생 당연하게 해왔던 먹고 삼키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목 주변을 넓게 절제한 탓에 팔에 힘을 주기도 어려웠다. 수술 전부터 통증 탓에 체중이 줄었고 수술 뒤에는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더 말랐다. 오래 누워 지낸 탓에 근육도 빠졌다.
목에는 커다란 흉터가 생겼고 기도를 열었던 자리도 크게 파여 있었다. 흉터를 가리기 위해 목을 감싸거나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혀를 절제하고 이식하면서 발음과 목소리도 이전과 달라졌다.
무엇보다 장씨에게 먹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맛을 볼 수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수술하고 한 2~3개월 쉬면 다시 직장에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맛도 못 보고 먹을 수도 없으니까요.”
돌아가려고 했던 원래의 일상이 생각보다 멀리 있었음을, 장씨는 그제야 깨달았다.
답답하다|아픈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시선
몸이 조금씩 회복되자 다시 일을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암 이전처럼 주방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어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했기에 오랜 시간 일하기도 쉽지 않았다. 주방 일이나 설거지처럼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도 부담스러웠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카페와 빵집 등에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면 ‘아픈 사람이 일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려고 하는 거죠.”
장씨는 나이와 치료 일정 등 여러 조건이 구직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등하원을 돕는 일도 알아봤지만, 아픈 사람을 꺼리는 학부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작 장씨에게 ‘암 환자’라는 정체성은 그리 크지 않다. 치료를 받고 있을 뿐,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여전히 많다. 하지만 사회와 부딪힐 때면 자꾸만 자신이 암 환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의심을 받고,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암 환자는 무기력하고 약하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선이 먼저 따라붙는다. 암은 장씨가 겪고 있는 삶의 일부일 뿐, 장씨라는 사람의 전부는 아닌데도 말이다.

‘집에 가면 뭐 하지.’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 쉬는 날에도 할 일을 찾았고 하루가 비어 있으면 불안했다.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장씨에게는 전에 없던 시간이 생겼다. 늘 일터에 있던 시간,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이 빼곡했던 시간이 통째로 비었다. 처음에는 그 시간이 낯설었다.
퇴원 뒤에는 체력을 되찾기 위해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분도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걷는 시간을 늘리다 보니 집에서 40분쯤 떨어진 곳에 마음에 드는 카페가 하나 생겼다. 원래 커피를 좋아했던 장씨는 그곳까지 걸어가는 일을 하루의 작은 목표로 삼았다.
평일 오전 10시. 예전 같으면 한창 점심 식사 준비로 분주할 시간이었다. 카페에 도착하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했다. 돌아올 힘이 남아 있으면 걸었고, 지치면 버스를 탔다. 그렇게 일주일에 서너 번씩 카페를 찾았다.
창밖에는 사람들이 오갔고 세상은 별일 없이 흘러갔다. 자신이 그 안에서 잠시 빠져 있어도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게 굴러갔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쉼표를 찍은 거예요. 좀 쉬엄쉬엄 천천히 가도 큰일은 안 나더라고요. 세상은 다 돌아가요.”
멈추는 법을 몰랐던 장씨에게 암은 원치 않았던 쉼표를 찍었다. 낯설었던 그 쉼표는 조금씩, 자신의 속도로 살아도 괜찮다는 여백이 됐다.
그립다|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는 삶
거창한 바람은 아니었다. 청양고추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김치찌개를 다시 먹고 싶었다. 예전에는 닭발처럼 매운 음식도 즐겨 먹었지만 이제는 상상으로만 입맛을 다신다.
“
방사선치료 이후 침샘 기능이 떨어졌다. 입안에 침이 충분히 생기지 않으니 음식을 삼키는 것부터 쉽지 않다. 국수나 떡은 잘 넘어가지 않고 밥알도 입안에서 따로 굴러다닌다. 혀에는 화상을 입은 것 같은 상처가 남아 매운 음식이 닿으면 아프다.
김치가 생각날 때면 백김치를 먹는다. 맵지 않아 먹을 수는 있지만 장씨가 그리워하는 매운맛까지 대신해주지 못한다. 얼큰한 국물을 한 숟갈 떠먹고 밥을 후루룩 말아 먹던 김치찌개는 이제 머릿속에만 남아 있다.
담대하다|중환자실보다 무서운 게 있을까
장씨는 수술 뒤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마치면 이제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3개월 뒤, 암이 폐로 전이됐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설암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무서웠다. ‘나 죽을 수도 있겠구나.’
수술 뒤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던 순간이 떠올랐다. 온몸에는 각종 의료기기가 연결돼 있었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곳에 누워 처음으로 죽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야겠다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살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인생에서 중환자실에서 눈 떴을 때보다 두려운 게 더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씨는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도 걱정부터 앞섰고 생각만 하다 그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고 나니 두려움의 기준이 달라졌다. 실패하는 것보다 해보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더 아쉬워졌다.
예전 같으면 망설였을 일에도 일단 발을 내디뎠다. 그중 하나가 시니어 모델이었다. 주변에서 모델을 권할 때마다 ‘날고 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싶어 흘려들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한 번 해보지 뭐.’ 죽음까지 생각해봤는데 떨어지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었다. 그렇게 시니어 모델 지원서를 냈다.
전속 시니어 모델로 선발돼 무대에 서보니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원래 모델에 관심이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얼마 뒤 친정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대학 시절 의류학과 졸업전시 무대에 학생 모델로 섰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이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오래 품고 있었지만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던 일을 암을 겪은 뒤 다시 시작하게 된 셈이다.

장씨가 암 진단을 받기 몇 달 전, 큰딸이 함께 마라톤을 뛰자며 러닝화를 사왔다. 간단히 연습한 뒤 그해 4월, 장씨는 딸과 함께 인생 첫 마라톤에 도전했다. 그리고 석 달 뒤 장씨는 설암 진단을 받았다.
‘나 다시 뛸 수 있을까.’ 수술 뒤에는 다시 달리는 것은커녕 예전처럼 걸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오래 누워 지내며 근육이 빠진 몸으로 퇴원한 뒤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분, 그다음에는 조금 더 멀리.
그러다 천천히 뛰어봤다. 2~3㎞를 달렸다. 생각보다 몸이 따라왔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혼자 8㎞까지 달렸다. 달리기 시작하면서 장씨는 달리는 자신에게 슬로건을 하나 붙였다. ‘걸음아, 나 살리자.’
처음에는 말 그대로 몸을 살리기 위한 걸음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 다시 체력을 되찾아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을 품고 달린다. 뛰다가 힘들면 걷고 걷다가 힘들면 잠시 멈춘다. 다시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이면 된다. 살기 위해 내딛었던 걸음이 이제는 미래를 꿈꾸게 했다.
암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앞으로 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친구처럼 잘 타협하며 지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장씨는 100살이 넘은 미래의 자신을 그려본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몸을 잘 돌보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
“죽기 싫더라고요. 죽도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삶은 마라톤과 닮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속도로 달릴 수는 없다. 숨이 차면 속도를 늦추고 때로는 걸어야 한다. 잠시 멈추는 순간도 있다. 그래도 다시 움직일 힘이 생기면 다음 걸음을 내디디면 된다.
오늘도 장씨는 신발 끈을 묶는다. 뛸 수 있으면 뛰고, 힘들면 걷는다. 잠시 멈추더라도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딘다. ‘걸음아, 나 살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