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4 읽음
'금융기본권', 금융안전망의 제도화
데일리안무차별적 대출이 아니닌 성실 상환자가 정상 금융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
잘 설계된 금융기본권은 재기의 사다리…불법사금융 줄이는 예방정책

이는 금융을 단순한 복지성 현금지원이 아니라, 국민이 경제생활에 참여하고 위기에서 회복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다.
제도의 성패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데 있지 않다.
금융에서 배제된 국민을 불법·고금리 시장으로 내몰지 않고, 상담·채무조정·보험·대출·저축을 연결해 정상 금융으로 복귀시키는 데 제도의 취지가 있다.
현재 논의되는 금융기본권은 접근권, 생존권, 재기권, 자립권, 자산형성권의 다섯 축으로 구성된다.
이를 구현하는 수단은 기초상담·채무조정, 기초보험, 기초대출, 기초저축의 ‘4대 기초금융’이다.
최근 논의에서는 소득 하위 30%를 대상으로 최대 1000만원의 장기·저리 기초대출을 검토하고 있으며, 취약계층의 의료비 위험을 줄일 기초보험도 함께 거론되고 있다.
금융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시장원리를 부정하는 정책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이 해결하기 어려운 정보 비대칭, 신용위험의 외부효과, 불법사금융 확산이라는 시장실패를 줄이는 장치이다.
저신용자는 소득이 낮아서만 금융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연체 이력, 불규칙한 소득, 담보 부족, 금융 지식의 결핍이 결합하면서 ‘신용 부족’이라는 하나의 낙인이 매겨진다.
민간 금융회사가 개별 차주의 위험만 계산해 대출을 거절하는 것은 경영상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거절은 고금리 대부, 불법사금융, 장기 연체, 노동시장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개별 금융회사의 위험 회피가 사회 전체의 비용 증가로 바뀌는 것이다.
금융기본권의 첫 번째 순기능은 불법·고금리 금융으로의 추락을 막는 예방효과이다. 기초대출은 더 위험한 빚으로 넘어가기 전에 최소한의 안전한 통로를 제공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둘째, 금융기본권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키우기보다 상환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될 수 있다.
현 정책 서민금융은 상품별·기관별로 분절돼 있어, 이용자가 자신의 문제에 맞는 지원을 찾기 어렵고 지원을 받은 뒤에도 정상 금융으로 복귀할 경로가 불명확하다.
반면 상담과 채무조정을 먼저 실시하면 과도한 채무를 정리하고, 소득·지출·상환능력에 맞춰 필요한 지원만 제공할 수 있다.
이후 보험을 통해 의료·사고 위험을 줄이고, 소액·장기 자금을 공급하며, 저축과 신용관리로 연결하면 ‘연체-고금리-재연체’의 악순환을 끊을 가능성이 커진다.
셋째, 금융기본권은 금융소비자의 회복탄력성을 높인다.
금융계좌는 단순히 돈을 보관하는 수단이 아니라, 급여 수령, 공과금 납부, 비상 자금 축적, 보험금 수령, 신용 이력 형성의 기반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초저축과 기초보험을 대출과 동등한 축으로 놓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진국의 경험은 금융기본권이 공상적 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법률상 ‘계좌에 대한 권리(droit au compte)’를 운영한다.
은행에서 계좌개설을 거절당한 사람은 프랑스 중앙은행인 방크 드 프랑스에 신청할 수 있고, 중앙은행은 지정 절차를 통해 기본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금융기관을 연결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대출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라, 최소한의 지급결제와 금융 생활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성공적 출발점이다.
영국의 기본 은행계좌(Basic Bank Account)도 중요한 사례다.
기본 은행계좌는 일상적 지급결제에 필요한 기능을 수수료 없이 제공하되, 일반적으로 당좌대월 기능을 제한해 과도한 부채 확대를 막는 구조이다.
해당 제도는 금융 배제층에게 계좌와 결제수단을 제공하면서도, 신용공급을 무제한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
물론 금융기본권에는 엄격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기초대출은 일률적 보편대출이 아니라 긴급성·상환능력·기존채무 수준을 반영한 선별적 공급이어야 한다.
또한, 대출보다 상담과 채무조정이 먼저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성실 상환자에게는 금리인하·한도 확대 같은 명확한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금융기본권은 금융을 공짜로 제공하자는 요구가 아니다.
누구도 위기 한 번으로 금융시장에서 영구 퇴출되지 않게 하자는 사회적 약속이다.
잘 설계된 금융기본권은 저신용자에게는 재기의 사다리가 되고, 금융회사에는 미래의 정상 고객을 만드는 투자이다.
나아가, 사회 전체에는 불법사금융과 장기부실의 비용을 줄이는 예방정책이 된다.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