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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치 코트와 항공 선글라스, 전쟁터에서 탄생한 패션 아이템들
BEMIL 군사세계8월 말에 접어들며 처서가 지났는데도 뜨거운 나날이 지속되는 요즘…
그래도 여름의 끝을 보내고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며 패션 브랜드들은 FW(Fall and Winter) 신상 아이템들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가을 하면 단연 떠오르는 아이템들, 트렌치코트부터 재킷, 두툼한 니트까지.
그런데 이 옷들을 하나씩 파고들다 보면 대부분이 군대와 전쟁터에서 실용적인 이유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렇게 참호에서, 조종석에서, 갑판에서 태어난 밀리터리 기원 패션 아이템 10가지를 모아봤습니다.
① 참호와 전선을 누비던 육군의 옷 — 트렌치코트, M-65 야전상의
트렌치코트 — 참호에서 검증된 우비
「트렌치코트 / V Magazine」
트렌치코트의 뿌리는 1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23년 찰스 매킨토시가 고무를 얇게 입힌 방수 원단을 발명한 게 시작이었는데요.
rolandsjoinery.com>
매킨토시 코트의 방수 원단은 고무 냄새가 심하고 뻣뻣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공기도 전혀 통하지 않아서 장시간 입고 있으면 안쪽에 열과 땀이 그대로 갇혀버렸죠.
이 한계를 넘어선 게 아쿠아스큐텀과 버버리였습니다.
아쿠아스큐텀은 1853년 원단 자체에 방수 처리를 한 개량 원단을 내놨습니다.
버버리는 1879년 실 한 가닥 한 가닥에 방수 가공을 한 뒤 짜는 '개버딘'을 선보였고요.
방수와 통풍을 동시에 잡은 획기적인 원단이 이렇게 완성됐습니다.
방수는 유지하면서도 숨을 쉬는 원단이 나오자 상류층과 탐험가·비행사들 사이에서 이런 코트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Tweedland The Gentleman's club>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진흙과 물이 가득한 참호에서는 무거운 모직 그레이트코트 대신 가볍고 방수되는 코트가 필요했습니다.
영국군 장교들은 전쟁성(War Office)이 지급한 피복 구입비로 버버리·아쿠아스큐텀 같은 민간 업체를 찾아가 직접 주문해 맞춰 입었는데요.
Contrado>
이렇게 여러 제조사의 방수 코트가 참호 속에서 실전 검증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1916년에는 영국 재단업계 트레이드 저널에 '트렌치코트(참호 코트)'라는 이름이 처음 인쇄물로 등장했습니다.
<1916년 영국 '아쿠아스큐텀'의 트렌치코트 광고 /
Tweedland The Gentleman's club
>
트렌치코트가 지금까지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겉보기엔 장식 같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사실은 전부 참호전을 버티기 위한 기능이었거든요.
「트렌치코트 디테일 모음 - D링, 견장, 건 플랩 등 / Dunnio Tailor」
먼저 허리 벨트에 달린 D링입니다.
수류탄을 걸어두는 고리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여기에 더해 지도 케이스나 쌍안경 같은 장비를 손에 바로 닿는 위치에 매달아두는 용도로도 함께 쓰였습니다.
어깨 위의 견장은 계급장을 다는 용도로 익숙합니다.
여기에 더해 가스 마스크 가방이나 쌍안경, 장갑 같은 소지품을 어깨에 걸어둘 때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실용적인 구실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가슴에 덧대어진 건 플랩(스톰 플랩)입니다.
소총 개머리판이 자주 닿는 자리라 오염과 마모를 막기 위해 덧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여기에 더해, 오른팔을 들어 쌍안경을 보거나 권총을 뽑을 때
이중으로 여며진 앞섶 틈새가 벌어지면서 빗물이 흘러드는 걸 막아주는 역할도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더해진 디테일들 덕분에 장교들은 진흙과 빗물 속에서도 임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버버리와 아쿠아스큐텀은 이 디테일들을 그대로 남긴 채 체크무늬 안감 같은 장식 요소를 더했습니다.
트렌치코트가 군복에서 완전히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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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5 필드 재킷 — '야상'의 원조

우리에게는 '야상(야전상의)'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옷입니다.
1941년 2차대전용 M-41 야전코트에서 출발해 M-43, M-51 등 다양한 개량을 거쳤고, 1965년 미군 군납업체 알파 인더스트리가 완성한 M-65가 지금까지도 야전상의 패션의 표준으로 남았습니다.
방수·방풍 기능에 탈부착 가능한 방한 안감, 목깃 속에 숨길 수 있는 후드, 넉넉한 주머니 4개까지. 베트남전 정글과 몬순 기후에 최적화된 실용적인 옷이었습니다. 파병된 장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요.
「베트남전에서 M-65 필드 재킷을 착용한 미군 / US ARMY」
그런데 이 인기에는 아이러니한 사연이 있습니다.
베트남전에 파병됐던 병사들이 귀국하면서 이 재킷을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요.
정작 이 옷을 유행시킨 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참전용사와 히피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상징이었던 옷이 반전운동의 상징이 되어버린 겁니다.
Collectors Weekly>
이후 70년대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들이 쏟아지며 스크린을 통해서도 존재감을 키웠고,
2009년 공식 군납이 끝난 뒤로는 완전히 스트리트 패션의 스테디셀러가 됐습니다.
「패션 아이템이 된 M-65 필드 재킷 / 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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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진정한 에어맨이 입었다! — 항공재킷 & 항공 선글라스
무스탕(B-3 재킷) — 영하 40도를 버틴 양가죽 재킷
1917년, 미 육군은 오픈 콕핏 전투기 조종사들을 위한 첫 표준 방한 재킷을 만들었습니다.
이 재킷은 이후 1927년 A-1, 1931년 A-2로 이름을 바꿔가며 계속 개량됐는데요.
말가죽이나 염소가죽으로 만든 이 재킷들은 비교적 낮은 고도에서 빠르게 기동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는 충분한 방한복이었습니다.
문제는 폭격기 승무원들이었습니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3만 피트 상공, 영하 40~60도에 이르는 환경에서 8~9시간씩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용 재킷만으로는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1934년 나온 게 양가죽을 통째로 사용한 B-3 재킷입니다.
이후 2차대전 내내 유럽 상공을 날던 고고도 폭격기 승무원들의 표준 장비로 굳어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스탕'이라 부르는 이 옷은 정작 영어권에서는 '셰어링(Shearling) 재킷' 또는 'B-3'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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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1 항공 재킷 — 은은한 광택의 나일론 재킷

봄·가을에는 MA-1 항공 재킷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밀리터리 기원 아이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오래 사랑받아온 옷이기도 하죠.
은은한 광택이 도는 나일론 '플라이트 새틴' 원단,
가슴 지퍼 옆에서 산소마스크 코드를 잡아주는 탭,
왼쪽 팔뚝의 담배 주머니(펜꽂이 겸용 유틸리티 포켓)까지.
지금 보면 디자인 요소 같지만, 하나같이 좁은 조종석 안에서 필요한 기능을 그대로 옮겨온 것들입니다.
여기에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기능이 하나 더 숨어 있는데요.
바로 뒤집어 입을 수 있는 리버서블 구조입니다. 안감을 겉으로 꺼내 입으면 선명한 주황색 면이 드러나는데요.
「주황색 안감 적용으로 비상시 뒤집어 입을 수 있는 MA-1 재킷 / 알파 인더스트리」
조종사가 격추되거나 불시착해 낯선 지역에 떨어졌을 때,
재킷을 뒤집어 입는 것만으로 구조대 눈에 띌 수 있도록 만든 생존 장비였습니다.
MA-1은 이렇게 조종석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었지만,

정작 MA-1이 오래 살아남은 곳은 그 바깥이었습니다.
군에서 쓰던 물량이 잉여 군수품으로 시중에 풀리면서 민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는데요.
값이 싸고 튼튼한 데다,
앞서 살펴본 디테일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스타일까지 더해지면서
MA-1은 자연스럽게 청년들의 옷이 됐습니다.
그렇게 60~70년대 영국 청년 서브컬처와 80년대 힙합 신을 거치며
밀리터리 룩, 스트리트 패션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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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선글라스 — 톰 크루즈, 맥 아더 장군의 그 선글라스
「영화 [탑건(1986)]에서 매버릭(톰 크루즈)이 착용한 항공 선글라스 / 파라마운트 픽처스」
활주로 옆, 오토바이 위에서 이륙하는 F-14 톰캣을 올려다보던 매버릭의 그 선글라스를 기억하실 텐데요.
1986년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가 쓰고 나온 이 선글라스는 사실 할리우드가 아니라 1930년대 군용 비행 장비에서 시작된 아이템입니다.
1920년대, 미 육군항공대 조종사들은 고고도 비행 도중 강한 햇빛 때문에 시력이 손상되는 문제를 겪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군은 뉴욕의 의료기기 제조사 바슈롬(Bausch & Lomb)을 찾아가 눈부심을 막을 수 있는 안경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는데요.
이렇게 개발된 시제품이 1936년 군에 지급되기 시작했고, 1937년, 광선(Ray)을 차단(Ban)한다는 의미의 '레이밴 에이비에이터'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받아 일반에도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위쪽은 코팅해 눈부심을 막고 아래쪽은 코팅을 얇게 남겨 계기판을 잘 보이게 한 그라데이션 렌즈까지 개발됐고요.
테와 다리는 얇은 금속으로 만들어 무게를 최소화했는데, 비행 헬멧을 쓴 상태에서도 관자놀이나 귀 뒤를 짓누르지 않고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항공 선글라스는 철저히 조종석을 위한 장비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비가 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는 정작 하늘이 아니라 해변에 있었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착용한 항공 선글라스 / MyDutyFree blog」
1944년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해변에 상륙하며
이 선글라스를 낀 채 사진기자들 앞에 섰고, 이 장면이 그대로 신문을 도배했는데요.
영웅적 이미지와 함께 선글라스도 단숨에 대중적인 아이콘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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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멧 백 — 조종사의 헬멧 가방이 데일리 백이 된 사연
「미군 조종사 헬멧 백 / Pivot Case」
1960년대 미군 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헬멧 백은 이름 그대로 조종사가 비행 헬멧과 통신 장비를 담아 다니던 가방입니다.
나일론 원단에 튼튼한 지퍼, 앞쪽에 커다란 주머니 두 개가 달린 각진 실루엣이 특징인데요.
헬멧이라는 부피 큰 장비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설계한 게 핵심이었습니다.

이 각지고 넉넉한 실루엣이 최근 몇 년 사이 패션 업계의 눈에 들었습니다.
일본의 헤리티지 브랜드 포터부터 H&M이나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 브랜드까지 앞다퉈
'헬멧 백'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실루엣의 가방을 내놓고 있는데요.
POTER-YOSIDA & Co.>
헬멧을 담기 위해 잡았던 치수가, 지금은 노트북과 서류를 넣기 딱 좋은 크기가 되면서
실용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③ 차디 찬 파도와 바닷바람을 뚫고 — 해군 코트
피코트 — 겨울 코트의 표준이 된 네덜란드 수병의 옷
「피코트를 착용한 미 해군 수병 / Atom Retro」
짧고 두툼한 모직에 목까지 채울 수 있는 넓은 옷깃, 두 줄로 늘어선 단추. 피코트입니다.
이 옷의 시작은 네덜란드였습니다.
피코트(Pea Coat)라는 이름부터가 거친 모직 원단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페이(pij)'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해상 강국이던 시절, 네덜란드 수병들이 이 원단으로 지은 짧고 두꺼운 코트를 입은 게 출발점이었습니다.
「19세기 미 해군 피코트 / Heddles」
이 옷을 제복으로 굳힌 건 미 해군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해군 복제 규정에 오른 뒤, 1990년대까지 100년 넘게 사병들의 방한복으로 남았는데요.
디테일은 철저히 갑판 위의 사정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기장이 짧은 건 돛대와 삭구 사이를 편하게 오르내리기 위해서였고.
단추를 두 줄로 나눠 단 건 밧줄에 단추가 걸리지 않게 하려는 거였습니다.
목과 귀로 들이치는 바닷바람과 물보라를 막기 위해 넓은 옷깃을 달았고요.

이렇게 갑판 위의 필요에 맞춰 잡힌 비율은, 배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대로 통했습니다.
엉덩이를 덮지 않는 짧은 기장,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는 실루엣. 도시에서 입기에도 손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코트는 형태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지금도 남녀 구분 없이 겨울 코트의 기본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플코트 — 몽고메리 장군과 드라마 [도깨비] 김고은의 '떡볶이 코트'
<
tvN 드라마 [도깨비] 김고은 배우가 착용한 더플코트
/ tvN>
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배우 김고은이 입고 나왔던 그 코트, 더플코트입니다.
극 중 은탁이 즐겨 입던 이 코트는 방영 이후 한동안 겨울철 품절 대란을 일으킬 정도로 화제였는데요.
사실 이 코트는 훨씬 이전부터 군복으로 쓰이던 유서 깊은 아이템입니다.
「더플코트를 착용한 영국 왕립 해군 / Duffle Coat Shop」
더플코트의 이름은 벨기에 안트베르펜 지방의 작은 마을 '뒤펠(Duffel)'에서 왔다고 전해집니다.
이 마을에서 생산되던 두껍고 거친 모직 원단의 이름이 곧 코트의 이름이 된 것인데요.
후드와 토글 단추가 달린 스타일은 원래 폴란드 군복 외투에서 유래해 19세기 중반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1890년경부터는 영국 해군도 이 코트의 간소화된 버전을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장갑을 낀 채로 코트 앞섶을 여밀 수 있는 토글 단추 / Etsy」
2차대전 당시에는 영국군 전체가 이 코트를 즐겨 입었는데요.
그중에서도 몽고메리 장군이 유독 이 코트를 자주 걸치고 다니면서,
영국에서는 더플코트가 아예 '몽고메리 코트(Monty coat)'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가 됐습니다.
「더플코트를 착용한 몽고메리 장군(우) / DeToujours.com」
전쟁이 끝난 뒤 영국에서 군수품 재고로 대량 풀리며 학생들 사이에서 저렴하고 실용적인 코트로 인기를 끌었고,
이후 완전히 시민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는데요.
재미있게도 이 코트는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입니다.
영국에서는 몽고메리 장군 때문에 '몽고메리 코트'라 불렸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토글 단추가 떡볶이의 기다란 떡 처럼 생겼다고 해서 '떡볶이 코트'라는 애칭으로 통합니다.
코만도 스웨터 — 다부진 근육이 드러나는 영국군 특수부대의 스웨터
「영화 [007 : 노 타임 투 다이] 제임스 본드의 코만도 스웨터 / Iconic Alternatives」
영화 [007 :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가 입고 등장했던 그 두꺼운 니트, 코만도 스웨터입니다.
지금은 '울리 풀리(woolly pully)'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코만도 스웨터는 2차 세계대전 초,
영국 특수부대 SAS와 코만도 부대, 그리고 왕립공군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지급되던 두꺼운 니트였는데요.
「영국군 특수부대가 착용한 코만도 스웨터 / Analog:Shift」
어깨와 팔꿈치에는 튼튼한 패치를 덧댔습니다.
무거운 장비를 메고 벗을 때 원단이 상하는 것을 막고,
날카로운 곳에 걸려 올이 풀리지 않도록 신경 쓴 디테일입니다.
본래 특수부대의 야간 작전이나 난방이 안 되는 폭격기 내부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고안된 만큼,
확실한 방한성과 거칠게 굴려도 견고한 내구성이 이 옷의 핵심입니다.
두툼한 니트가 만들어내는 묵직한 실루엣 덕분에, 어깨가 넓고 다부진 남성이 입으면 멋이 한층 살아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옷의 가장 큰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브레통 셔츠 — 줄무늬 셔츠 역사가 따로 있다고?

지금은 하나의 티셔츠 그래픽 디자인 정도로 여겨지는 줄무늬(스트라이프) 셔츠가 사실은 프랑스 해군과 얽혀 있는데요.
바로 브레통 셔츠입니다.

가로 줄무늬 티셔츠의 원조인 브레통 셔츠는 1858년 프랑스 해군성 장관 아멜랭 제독이 발표한 공식 규정에서 출발합니다.
브르타뉴 지방에 배치된 프랑스 해군 병사들의 유니폼이었죠.
몸통에는 폭 20mm 흰 줄무늬 21개와 폭 10mm 남색 줄무늬 20~21개를,
소매에는 이보다 조금 좁은 줄무늬를 정확히 규정한 옷이었습니다.
이 줄무늬는 멋을 내려고 넣은 게 아니었습니다. 바다 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장치였는데요.
흰색과 남색이 강하게 대비되는 덕분에, 수병이 바다에 빠졌을 때 파도 사이에서 훨씬 빨리 눈에 띄었습니다.
옷을 짓는 방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형 편직으로 통째 짜올려 이음새와 단추가 없었기 때문에, 밧줄이나 그물에 걸릴 위험도 적었고요.
이렇게 군복으로 규정된 지 60년 가까이 흐른 뒤, 이 옷을 패션계로 끌어올린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코코 샤넬입니다.

1917년, 노르망디 해안 마을 도빌에서 휴가를 보내던 샤넬은
현지 어부들이 입은 이 줄무늬 셔츠에 매료돼 자신의 컬렉션에 그대로 반영했는데요.
이후 피카소, 오드리 헵번, 존 웨인 등 유명 인사들이 즐겨 입으며
프랑스 해군 유니폼은 완전히 여름 시즌 클래식 아이템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마무리
트렌치코트도, 항공 재킷도, 스웨터 한 벌도 처음엔 전부 살아남기 위한 옷이었습니다.
이 아이템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디자인 하나하나에 다 이유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빗물을 막으려고, 장갑 낀 손으로도 단추를 채우려고, 물에 빠진 동료를 눈에 띄게 하려고.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반드시 필요해서 만들어진 디테일들인데요.
물론 지금은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꼭 필요해서 이 옷들을 입는 시대는 아닙니다만,
군과 전쟁터에서 실용성을 높이기 위해 고민했던 착용 방식과 함께 발전해온 원단 기술은
이후 복식 문화 전반에 크고 작은 변화와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 덕분에 유행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의 표준이자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에디터= 신제범 / jebm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