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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당대의 이탈리아 경제, 사회
[경제 (Economy): 무역 중심지의 이동과 자본주의의 맹아] (그림 1~4)
경제적으로는 중세식 봉건제가 무너지고, 상업과 금융을 중심으로 한 초기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시기였습니다.
•메디치 가문과 금융업: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유럽 전역에 지점을 둔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 자본이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의 타격: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시기(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등)는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던 때였습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와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제적 독점권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길드(Guild)의 영향력: 모직물, 견직물 등 수공업 길드가 강력한 자금력으로 도시 정치를 쥐고 흔들었으며, 예술가들 역시 이 길드에 속해 주문을 받았습니다.
[사회 (Society): 신분 변동과 종교개혁의 충격] (그림 5~6)
중세적 신분제가 동요하고,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뿌리째 흔들리는 정신적 대격변기였습니다.
•시민 계급(부르주아)의 부상: 귀족이 아니더라도 상업과 금융으로 돈을 번 평민(시민)들이 사회의 주류로 올라섰습니다. 이들은 예술품을 구입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했습니다.
•종교개혁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가톨릭의 권위가 폭락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가톨릭 교회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운동을 펼쳤고, 예술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노년에 그린 <최후의 심판> 속 누드화들이 "음란하다"며 검열 대상이 된 것도 이 사회적 분위기 때문입니다.
•흑사병과 매독의 창궐: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돌며 인구의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종교적 심판에 대한 예술적 영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세티 예배당 벽화 (Sassetti Chapel Frescoes)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82~1485): 메디치 은행의 총지배인이자 환전상 길드의 거물이었던 프란체스코 사세티의 의뢰로 기를란다요(미켈란젤로의 스승)가 그린 연작 벽화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다루고 있지만, 배경에는 당시 피렌체 길드 상인들의 실제 모습과 도시 풍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