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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치 청문회 논란, 기술관료 권력과 통제되는 민주주의
최보식의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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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의언론=정규재 전 한국경제 주필]
2020∼2021년 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봉쇄 방역'을 지휘했던 미국 방역 책임자였던 앤서니 파우치 전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의 미 상원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다. 파우치가 청문회에서 묵비권을 계속 행사하자, 공화당은 의회모독죄를 적용하기로 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코로나 방역을 지휘했던 정은경 식약청장은 이보다 훨씬 더 강제적인 '봉쇄' '통제' 방역을 했다. (편집자)

앤서니 파우치를 두고 미국이 요란하다.

최근 미국 상원에서 파우치 청문회가 진행되었고 파우치는 의원들의 질문공세를 피하기 위해 수정헌법에 따른 묵비권을 2백 번이나 거푸 사용했다고 한다.

파우치는 트럼프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최고 수준의 질병 전문가다. 미국의 ‘알레르기 감염병 센터’의 소장이었으며 지난 수년간의 코로나 펜데믹 과정에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대응체계를 사실상 장악 지휘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전문기술 관료로 아마도 세계 최고의 권력을 수년동안 누렸을 것이다.

그의 요구에 따라 백화점은 문을 닫았고 정치는 중단되었으며, 인간 활동의 거의 모든 동작들이 금지되거나 중단되었다.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우리 앞에 놓였던 대비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파우치 노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웨덴의 경우처럼 '자연 면역'이었다.

지금에 와서 지난 시기의 상황을 재평가하면 두 대립적인 선택의 결과는 놀랍게도 거의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감염 차단을 이유로 그 모든 희생을 감당해야 했다는 말인가.

파우치는 무엇을 근거로 사람의 작은 행동에까지 “된다” “아니다”로 허용과 금지의 명령을 내리고 행동을 통제하고 자유를 구속하였던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파우치는 그러나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질문에 침묵했고 쇠된 목소리로 수정 헌법을 들먹이며 묵비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상원은 파우치의 일기장을 공개했다. 그 일기장은 유치한 자기 자랑과 저명 정치인들과의 통화 사실들 만이 기록되었다.

상원 공화당의 위원장은 그 일기에는 "그 어떤 책임자로서의 의식도,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드는 위험에 대한 공포감도, 코로나의 확산을 경계하는 작은 언어적 표현"도 없었다고 조용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파우치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는 코로나 펜데믹을 즐겼다는 말인가.

20세기가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라는 의식, 사회적으로는 대중사회에 진입하면서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은 나치즘이었다. 인간은 수단에 불과했고 목적에 따라 조종되었다. 인간이 합리주의 시기를 통과하고, 계몽의 역설에 직면하면서 인간의 행동은 이제 막 발견된 수많은 과학적 명제에 따라 조작주의적으로 관리되는 그런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런 사회는 관료에 의해, 전문기술자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대중통제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게 된다.

관리되는 대중사회, 즉 개별 인간은 다만 숫자로 처리되는 그런 탈인격, 탈도덕 사회에서 파우치는 제왕이었다. 감염병과 알러지의 의학적 전문가라는 지위--!.

전문관료라는 냉정한 합리성과 관리 지식에 의해 경영되는 소위 통제사회의 신화는 그렇게 우리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펜데믹 수년 동안 민주주의는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상황을 맞았고 중국의 통제 상황에서 보듯이 국가는 개인을 구속의 틀 속에 집어넣고, 국가의 의지는 너무 쉽게 관철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파우치가 그런 경우라고?

그러나 이는 파우치의 경우만도 아니었다. IMF같은 경제적 재난의 경우에도 우리는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비롯해 개개인 수입의 경제적 가치 등 사회에 대한 교환권, 관리권을 너무도 쉽게 국가에 모두 반납하였다.

기술 관료들의 권력은 권력의 매단계마다, 위기의 매순간마다 더한층 강화되기 마련이다. 민주화된 사회라고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기술관료들의 관리권은 갈수록 그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다.

이는 정권의 좌우를 가리지도 않는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과신 즉, 지식물신주의라고 할까, 일종의 과잉 과학과 그것을 책임진다는 소위 관료집단이 대중을, 민주주의를 통제, 지배하는 그런 역전된 구조가 된다.

윤석열 정권은 실은 경제권력의 대부분을 관료들에게 넘긴 시기였고 이런 경향은 이재명 정권에 와서도 반복되고 있다.

최근의 부동산 정책같은 경우도 결코 다르지 않다. 급등하는 부동산 가격을 때려잡는다는 명분으로 민간 개개인과 시장에 대한. 정부 내지는 관료들의 통제권은 이미 헌법이 허용한 자유와 사회적 통제의 범주를 크게 넘어섰다고 나는 생각한다.

관료는 민주적 정권으로부터 그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받지만 한단계 두단계 규제가 강화될 때마다 민간인과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억제적 권력을 끌어안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 수도권의 모든 주민들이 거쳐야 하는 토지거래 허가제는 우리가 말단 행정 관료 앞에 나아가 조심스럽게도 “내가 그 아파트를 왜 구입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그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그런 관료독재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관청과 그것에 속한 자들은 나의 주택구입 자금을 조사하고 거드름을 피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돈도 많네!"라고 중얼거리며 허가와 불허가의 도장을 소리도 요란하게 꽝!하고 찍는 절차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물적 거래에 수반되는 은행거래는 매 경우마다 관료들이 곁에 지켜 서서 이 대출은 되고 저 대출은 안 된다고 말하는 그런 지시경제 혹은 명령경제 체제로 변해간다.

부동산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을 왜 국가권력이 나서서 그 가격이 “맞다” “틀리다”,“높다” “낮다” “적절하다”를 결정해야 하는지 그것부터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파우치에 대한 미국 상원의 질문 공세를 보면서 기술관료 집단이야말로 21세기의 새로운 권력이며 민주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표피적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무엇을 민주화라고 부른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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