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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당대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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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살았던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초반(1452~1519년)은 중세가 종말을 고하고 현대 세계의 틀이 짜인 인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격변기였습니다.


1. 중세의 종말과 이슬람의 팽창: 비잔티움 제국 멸망 (1453년) (그림 1)

다 빈치가 태어난 이듬해인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1,000년 넘게 이어져 온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문화적 영향: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피해 수많은 그리스·로마 학자들과 고문서들이 이탈리아의 피렌체, 베네치아 등으로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이들이 가져온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 연구가 기폭제가 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하게 되었습니다.


2. 세계 무대의 확장: 대항해시대의 개막 (그림 2)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와 육로 무역로를 장악하자, 유럽 국가들은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 아시아로 갈 수 있는 새로운 바닷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습니다.

•1498년 바스쿠 다 가마: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이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고,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글로벌 무역 체계가 시작되었습니다.


3. 지식의 대중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1450년경) (그림 3)

다 빈치가 태어날 무렵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유럽 최초로 금속활자를 인쇄술에 도입했습니다. 그동안 성직자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책(성경 및 학술 서적)이 대량 생산되면서 지식이 폭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4. 종교의 대전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1517년) (그림 4)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벌부 판매 등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교황 중심의 절대적인 중세 기독교 세계관이 무너지고 근대적인 국가와 개인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아시아의 상황 (조선과 명나라) (그림 5-1, 5-2)

유럽이 격변을 겪던 이 시기, 동아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유교 국가 체제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조선: 다 빈치가 태어났을 때 조선은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치세 직후였으며 문물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후 성종 대에 《경국대전》을 완성하며 기틀을 다졌고, 다 빈치가 사망할 무렵에는 중종반정(1506년) 이후 조광조의 개혁 정치 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의 대원정(정화의 항해)(1405~1433)을 마친 후,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전성기를 유지하며 찬란한 한족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중세의 신 중심 사회가 무너지고, 신대륙 발견과 지식 혁명을 통해 '인간과 과학' 중심의 현대 사회가 싹트던 위대한 전환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인물이었습니다.

(그림 1)《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향해 진군하는 메흐메트 2세와 오스만 군대 (Mehmed II at the Siege of Constantinople)》, 파우스토 조나로(Fausto Zonaro, 1903)


(그림 2)《콜럼버스의 첫 아메리카 상륙 (The First Landing of Christopher Columbus in America)》, 디오스코로 푸에블라(Dióscoro Puebla, 1862)


(그림 3)《구텐베르크와 인쇄기 (Johannes Gutenberg in his workshop, showing his first proof sheet.)》, 브리태니커(Britannica)


(그림 4)《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는 루터 (Luther Posts the 95 Theses)》, 페르디난트 파우벨스(Ferdinand Pauwels, 1872)


(그림 5-1)《경국대전(經國大典)》,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조선 시대의 최고 통치 규범이자 기틀이 된 최고의 기본 법전입니다.

세조 대에 국가 시스템을 유교적 법치주의로 재정립하기 위해 편찬을 시작하였으며, 수정과 교정을 거쳐 성종 16년인 1485년에 최종 완성되어 반포되었습니다.

육조(六曹) 체제를 기반으로 국가 시스템 전반을 규정하고 조종성헌(祖宗成憲)(※)의 원칙에 따라 국왕도 함부로 개정할 수 없는 안정적인 성문 법전으로, 조선의 행정, 재정, 예법, 군사, 사법, 공학 구조를 500년간 지탱했습니다.


※ 조종성헌의 핵심 원칙과 의의

•국왕 권력의 제한: 조선의 왕은 절대권력자가 아니었으며, 조종성헌이라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연속성 확보: 왕이 바뀔 때마다 국가의 정책이나 법률이 요동치는 것을 막고, 백 년, 이백 년 뒤에도 일관된 시스템으로 국가가 운영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신권(臣權)의 방어 무기: 신하들은 왕이 독단적인 명령을 내리거나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려 할 때, "조종성헌에 위배되옵니다"라는 명분으로 왕의 독주를 견제했습니다.


(그림 5-2)《명인화기린심도송축(明人畫麒麟沈度頌軸)》,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역사적 배경: 명나라 대동맹을 이끈 정화의 대원정단이 아프리카 동해안(말린디 왕국 등)에서 기린을 접하고, 이를 벵골 술탄국을 거쳐 1414년 명나라 영락제에게 조공품(방물)으로 바쳤습니다.

•기린의 상징성: 당시 중국인들은 목이 긴 아프리카 기린(Giraffe)의 모습과 현지어 발음(Giri) 등이 유교에서 말하는 전설 속의 성스러운 신수 '기린(麒麟)'과 완벽히 부합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영락제의 통치가 태평성대임을 하늘이 증명하는 최고의 '길조(서응)'로 여겨졌습니다.

•그림 (궁중 화가): 영락제의 명을 받은 익명의 명나라 궁중 화가들이 실제 기린과 사육사의 모습을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글과 서예 (심도): 한림원 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심도(沈度)가 영락제의 치세를 찬양하는 〈서응기린송〉이라는 글을 짓고, 완성된 그림 윗부분에 자신의 특기인 단정하고 아름다운 대각체(소춘체) 서체로 글씨를 정성스럽게 적었습니다.

•이 글은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가 자신에게 천명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린의 등장을 정치적으로 홍보한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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