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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쓰면 인지 부채, 철학 전공 취업률 컴공 추월
테크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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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까지 미국 대학가에서 "철학과에 가면 취업이 안 된다"는 말은 상식이었다. 최근 이 상식이 흔들리고 있다. 코드를 짜는 컴퓨터공학 전공자보다 사람과 윤리를 공부한 철학 전공자의 취업 성적표가 더 낫게 나오는 사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MIT 미디어랩 실험실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결과가 나왔다. AI에 생각을 맡길수록 사람의 뇌는 오히려 게을러진다는 것이다. 무관해 보이는 두 흐름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MIT 미디어랩 나탈리아 코스미나 연구원은 지난해 6월 '유어 브레인 온 챗지피티(Your Brain on ChatGPT)'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보스턴 지역 대학생 54명을 세 그룹으로 나눠 에세이 작성 과제를 맡겼다. 한 그룹은 어떤 도구도 없이 스스로 글을 썼다. 다른 그룹은 검색엔진을, 나머지 그룹은 챗GPT를 사용했다.

뇌파(EEG)로 신경 연결성을 측정한 결과 도구 없이 쓴 그룹의 뇌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검색엔진 그룹이 중간, 챗GPT 그룹이 가장 낮았다. 챗GPT 그룹 참가자의 83.3%는 자신이 방금 쓴 에세이에서 한 문장도 제대로 인용하지 못했다. 자기 글에 대한 주인의식도 세 그룹 중 가장 낮았다.

연구팀은 이를 '인지 부채(cognitive debt)'로 명명했다. 기술 부채가 쌓이듯, AI에 사고를 맡길수록 나중에 갚기 어려운 인지적 대가가 쌓인다는 뜻이다. 다만 이 논문은 아직 동료평가를 거치지 않은 프리프린트이며 표본도 54명으로 크지 않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 결과가 SNS에서 "뇌 연결성 47% 감소"처럼 논문에 없는 수치로 와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시장의 반전은 통계로도 일부 확인된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5일 '철학 전공자의 반격(The Revenge of the Philosophy Majors)'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올해 2월 갱신한 2024년 인구총조사 기준 자료를 인용했다. 이에 따르면 철학 전공자 실업률은 5.1%로, 컴퓨터공학 전공자(7%)보다 낮았다. AI 혁명이 정작 코딩 인력의 채용 시장을 흔들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같은 기사는 구글 딥마인드와 앤트로픽이 각각 최소 6명 안팎의 철학자를 사내에 두고 있다고 전했다. 오픈AI 샘 올트먼 CEO는 챗GPT의 행동 규범을 만들 때 수백 명의 도덕철학자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앤트로픽의 '상주 철학자'로 불리는 아만다 아스켈은 회사가 지난 1월 공개한 84쪽 분량의 문서 '클로드의 헌법(Claude's Constitution)'을 주로 집필했다. 이 문서는 AI가 "뛰어나게 도움이 되면서도 정직하고 사려 깊으며 세상을 배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AI 스타트업과 영국 정부 자문을 겸하는 철학 전공자 헨리 아저는 와이어드와의 인터뷰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개인교사로 고용된 이후 철학자에게 이만큼 좋은 시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흐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이르다는 반론도 있다. 옥스퍼드대 AI윤리연구소를 이끄는 에드워드 하코트 교수는 같은 인터뷰에서 철학자 채용이 기업 이미지 세탁, 이른바 '윤리 워싱'으로 이용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철학자를 고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소비자가 해당 AI를 더 윤리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대 다니엘 포갈 교수는 더애틀랜틱과의 인터뷰에서 AI 열풍이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실질적인 왜곡 효과를 낳고 있다고 우려했다. 철학 전문매체 데일리 너스가 소개한 한 연구는 다른 해석을 내놨다. 철학 전공자의 고용 성과가 좋은 진짜 이유는 인문학 고유의 경쟁력이 아니라 애초에 AI에 노출되는 정도가 낮은 직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AI가 대체하기 쉬운 업무일수록 고용 성과가 나빠졌다는 분석이다.

두 흐름을 겹쳐 보면 하나의 그림이 그려진다. AI가 인간의 사고를 대신할수록 인간의 뇌는 게을러진다. 동시에 노동시장 일각에서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비판적 사고와 윤리적 판단력에 더 높은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AI를 얼마나 잘 쓰느냐보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사고력을 얼마나 지켜내느냐가 개인의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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