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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임원 비전 부재론, 현장 왜곡과 리더십 오독
최보식의언론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강사의 질문에 임원들이 "사장이 되고 싶습니다"라고만 답하며 비전 부재를 드러냈다는 내용이다. 기자는 이를 근거로 한국 대기업 임원들이 도전 정신 없이 '안정적 관리자'로만 길러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일화는 비즈니스 최전선의 현실과 리더십의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희화화 한 왜곡에 가깝다.
실제 대기업 임원들이 거치는 선발 및 육성 과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러한 묘사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주요 기업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인재 육성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해왔다. 신입 사원 단계에서부터 입학하기 힘든 글로벌 명문대 MBA 출신이 포진해 있으며, 재직 중에도 핵심 인재를 선발해 국내외 탑스쿨 MBA 과정이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지적 훈련을 받고, 치열한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 경쟁을 거쳐 임원직에 오른 이들의 지적 수준과 토론 능력은 결코 일차원적이지 않다.
더욱이 이 칼럼은 삼성을 지탱해온 가장 강력한 조직 문화인 '자율성과 권한 위임'의 메커니즘을 완전히 오독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과 달리, 삼성은 개개인의 소신과 자율성을 억압하는 관료적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조직보다 부서장의 권한을 철저히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가졌다.
내가 과거 본사 간부 시절(과장)과 해외법인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을 돌이켜봐도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상위 임원들은 커다란 회사의 경영 목표 테두리 안에서라면 담당 부서장의 업무 영역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각 부서장은 자신의 책임과 권한 하에 소신껏 방향을 잡고 업무를 추진할 수 있었다.
과거 비서실의 소개로 그룹 최고위층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개인 사업가가 업무 협의차 나를 찾아왔을 때의 일화가 있다. 당시 비서실에서 내게 전달한 지침은 단 두 가지였다.
"최고위층의 소개로 방문하는 사업가이니 상대방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맞이하되, 업무는 전적으로 부서장 소신껏 처리하라."
최고위층에서 직접 주선해 보낸 귀빈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업무 판단과 의사결정의 전권은 현장 책임자에게 완전히 위임하며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 소신대로 처리했다..
해외법인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사는 현지에 최대한의 자율성과 권한을 부여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냉혹하리만치 철저하게 물었고, 성과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지급했다. 이러한 '권한 위임'과 '결과 책임', 그리고 '확실한 보상'의 삼박자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작동했기에 삼성전자가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 부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기업은 대한민국에 유일무이하다.
실제 임원 세미나나 워크숍에서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이 던져졌을 때 나오는 답변들은 결코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구체적인 전장(戰場)과 숫자가 들어차 있다.
"현재 글로벌 3위에 머물러 있는 제품군의 미세공정 수율을 경쟁사보다 6개월 먼저 90% 이상으로 끌어올려, 대형 고객사의 독점 공급권을 빼앗아 오겠다."
"경쟁사가 선점한 북미 시장의 틈새를 파고들기 위해 우리 고유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우회하는 신제품을 연내에 출시하고, 3년 안에 현지 점유율을 30%까지 뒤집어엎겠다."
이처럼 본인의 커리어와 조직의 운명을 건 구체적인 기술 장벽 돌파, 시장 탈환, 그리고 경쟁사 압도라는 야심 찬 청사진이 임원들의 진짜 답변이다.
이를 앞뒤 맥락 없이 "사장이 되고 싶다"는 단편적인 문장으로 요약해버린 것은, 본인이 미리 정해둔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아전인수(我田引水)식 가공이다.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강력한 의사결정권으로 자신이 설계한 이 거대한 판을 주도하겠다는 야망은 리더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책임감과 자신감의 발로다. 이를 단순히 '자리에 연연하는 속물근성'으로 치부하는 것은 비약이다.
한번 상식적으로 자문해보라. 칼럼에 묘사된 것처럼 온실 속에서 수동적으로 길러진 임원들이라면, 어떻게 피 말리는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시장에서 백전노장의 괴물 같은 경쟁사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회사를 세계가 경외하는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겠는가? 비즈니스의 냉혹한 생태계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순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한다.
학계와 평론가들은 종종 대기업 임원들을 시스템에 길들여진 수동적 관리자로 폄하하며, 자신들의 먹물 묻은 경영 이론을 돋보이게 할 소모품으로 쓰곤 한다.
그러나 진짜 혁신은 연구실의 정제된 언어유희에서 나오지 않는다. 강력하게 부여된 칼날 같은 권한 위임 속에서 소신껏 판을 짜고, 단 한 번의 판단 착오로 수천억 원이 허공으로 사라질 수 있는 극한의 압박 속에서, 제 살을 깎아내는 냉혹한 책임을 지며 매일 밤 피를 말리는 결단을 내리는 임원들의 사투(死鬪) 현장에서만 시작될 뿐이다.
현장의 무거운 고민을 가볍게 재단하는 이론적 비판보다, 우리 기업이 현장에서 축적하고 증명해 온 시스템의 실제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삼성전자 #기업경영 #현장과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