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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7년 조선 민간 조보, 선조 탄압으로 폐간된 최초 신문
데일리안
그런데 1577년 음력 11월 28일, 선조가 이 인쇄된 조보를 우연히 손에 넣게 된다. 대신들 앞에서 선조가 크게 분노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선조가 내세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국(史局), 즉 역사를 기록하는 기관의 권한을 사사로운 민간에서 침범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가기밀이 민간에 줄줄이 새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보에는 조정의 인사 정보뿐 아니라 외교 현안이나 군사 관련 소식도 담겼으니, 그것이 인쇄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팔렸으니 선조 입장에서는 크게 화를 낼 법한 일이었다. 선조의 분노가 커지자 처벌이 뒤따랐다. 민간 조보를 인쇄해서 판매하던 업자들 서른 명 남짓이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 유배형에 처해졌다. 조선 시대의 유배는 기간이 정해지지 않아 왕의 명령이 없는 한 사실상 영구적인 격리였으니, 이 업자들에게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벌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허가를 내준 쪽, 즉 의정부와 사헌부의 관료들도 책임을 면하지 못했다. 이들도 좌천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석 달 만에 조선의 민간 신문은 막을 내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율곡 이이가 이 일을 두고 한마디 했다는 것이다. 이이는 마침 황해도 해주로 낙향해 있던 시기였다. 그는 윗사람들은 저마다 책임을 피하려고 급급한데 정작 아랫사람들만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허가를 내준 것은 의정부와 사헌부의 관료들이었고, 인쇄를 한 것은 그 허가를 믿고 사업을 벌인 민간 업자들이었다. 관료들은 좌천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분에 그쳤다. 하지만 정작 허가를 믿고 따랐던 업자들은 유배라는 중형을 받았으니 이이의 비판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윗사람들의 책임 회피는 지금과 똑같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성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사건 이후로 1883년에 한성순보가 발행될 때까지 민간에서 신문을 발행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선조의 분노로 인해 300년 뒤로 돌려놓은 셈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 민간에서 조보가 계속 발행되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보곤 한다. 독일의 라이프치거 짜이퉁이 세계 최초의 일간 신문으로 인정받은 것이 1660년이니, 1577년의 민간 조보는 그보다 8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조선의 민간 조보가 세계 최초의 상업 일간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타이틀이야 상징적인 문제라고 치더라도, 지속적인 민간 신문의 존재가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만 한 문제다. 당장 불과 15년 뒤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터진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조정의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다는 소식이 퍼지자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정보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소문이 사실보다 빠르게 퍼지고, 사실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가기 마련이다. 민간 조보가 전란의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면,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선조의 사망 이후 실록을 편찬해야 했는데 관련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서 사대부 집에 보관된 개인 일기와 지방에 남아 있던 조보들을 악착같이 긁어모아야 했다. 만약 민간에서 조보를 계속 발행하고 있었다면 관련 기록들을 좀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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