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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총수 취미, 경영 철학 반영 및 신사업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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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기업 총수들의 취미는 흔히 돈이 많이 드는 여가 정도로 소비된다.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개인의 경영 철학이 투영되기도 하고, 스트레스 해소의 유일한 출구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수십억 원짜리 신사업이나 그룹의 대표 사회공헌 프로그램으로 직결되기도 한다. 과거 언론 보도와 공개 인터뷰, 주변인 증언을 토대로 검증된 재벌가 총수들의 취미 생활을 유형별로 정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 뉴스1

재벌 취미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슈퍼카 수집에서 단연 정점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다. 단순한 과시용이 아니라 전문가 수준의 깊이를 자랑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회장은 생전 용인 스피드웨이 등에서 직접 핸들을 잡았던 슈퍼카가 124대에 달했으며, 구매 비용만 450억~5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보도됐다. 연예계와 학계를 통틀어 자타공인 '취미 부자'로 통했던 그는 자동차 이외에도 진돗개 순종 보존에 유달리 진심이었다. 1960년대 직접 진도까지 내려가 진돗개를 사 와 연구했으며, 1970년대에는 세계애견연맹(FCI)에 진돗개를 정식 품종으로 등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진돗개가 국제 무대에서 공식 품종으로 인정받는 배경에 이 회장의 개인적 집착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취미는 사진 촬영이었다. 항상 최고급 카메라를 소지하고 다녔으며, 해외 출장 중이나 풍경이 좋은 장소에서는 직접 삼각대를 펴고 앵글을 잡았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매년 대한항공 달력의 메인 이미지를 장식했다. 유족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은퇴 후 손주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며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꿈"이었다고 할 만큼 사진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취미 하나가 그룹 대표 홍보물인 달력 콘텐츠로 직결됐다는 점에서 단순한 개인 여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LG그룹 총수들은 의외로 자연 친화적이고 소박한 취미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여의도 LG트윈타워 집무실에 고성능 망원경을 설치해 두고, 틈만 나면 한강 밤섬으로 날아드는 철새를 관찰했다.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종류를 맞출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 취미는 단순 관찰로 끝나지 않았다. 2000년 LG상록재단을 통해 국내 최초로 그림으로 된 조류도감 '한국의 새'를 발간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총수의 개인 취향이 그룹 차원의 문화·학술 사업으로 전환된 사례다.

고(故)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경우는 더 직접적이다. 1995년 아들 구본무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 천안의 연암축산원예대학 인근에 '수향농산'이라는 농장을 차리고 직접 된장과 고추장을 담그며 버섯 재배에 몰두했다. 과거 인터뷰에서 "젊어서는 교사가 꿈이었고, 늙어서는 농부가 꿈이었다"고 밝힌 그에게 농사는 취미이자 일상이었다. 재계 서열 최상위 그룹의 창업 2세가 은퇴 후 직접 흙을 만지는 삶을 택했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적잖은 화제가 됐다.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스트레스를 분출하는 총수들도 있다. LS그룹 오너 일가에서 이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은 대한자전거연맹 회장을 역임한 확실한 자전거 마니아다. 서울 자택에서 안양 사무실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으며, 2002년에는 동양인 최초로 유럽 알프스 산악자전거 대장정 750km를 완주한 기록을 갖고 있다.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검증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은 30대 중반부터 스킨스쿠버를 시작해 누적 잠수 기록이 2,000회를 넘고, 스쿠버 강사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가 직접 수중 촬영한 사진으로 달력을 제작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제안으로 LS전선은 매년 '전국 수중사진 공모전'을 주최하고 있다. 회장 개인의 취미가 그룹 브랜드 행사로 제도화된 구조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테니스에 대한 남다른 집착으로 유명하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깁스를 한 상태에서도 코트를 떠나지 않았다는 일화는 재계에서 꽤 회자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 뉴스1

소비자와 직접 맞닿아 있는 유통·뷰티 대기업 총수들의 취미는 상대적으로 트렌디하고 대중 친화적이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요리 마니아로 대중에게도 익숙하다. 개인 쿠킹 스튜디오 '용지니어스 주방'에서 직접 이마트나 노브랜드 신제품 개발을 위한 요리를 하거나, 유명인들을 초대해 대접하는 것이 취미다. 방송인 노홍철 등 연예인들의 SNS와 본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수준급 칼솜씨와 요리 결과물이 공개되기도 했다. 총수의 SNS 활동 자체가 브랜드 마케팅으로 기능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미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수집가다. 세계적인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가 선정하는 '세계 200대 컬렉터'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과거 인터뷰에서 "기업가가 되지 않았다면 미술평론가가 됐을 것"이라고 밝힐 만큼 조예가 깊다. 이 취미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PMA) 운영으로 직결됐다. 총수의 심미안이 기업 문화 인프라로 전환된 경우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의 취미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가장 극적으로 변해온 사례에 해당한다.

과거에는 국가대표급 승마 실력을 자랑했고, 안양CC 등지에서 골프를 즐기는 모습이 종종 목격됐다. 그러나 2017년 국정농단 사태와 특검 수사를 거친 이후 골프를 사실상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언론 보도에 따르면 명절 연휴나 주말 등 공백이 생길 때 자택 주변을 등산하거나, 산에서 컵라면을 먹거나, 집에서 조용히 영화를 감상하며 경영 구상을 하는 방식으로 취미 스타일이 완전히 바뀌었다. 승마와 골프라는 '권력의 스포츠'에서 등산과 컵라면이라는 '개인의 일상'으로 이동한 셈이다.

단순한 흥미를 넘어 총수의 취미가 왜 기업 경영과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려면 경영학의 상층이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전략과 방향은 결국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경험, 가치관, 인간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실제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구본무 회장의 철새 관찰은 LG상록재단의 조류도감 발간으로, 구자균 회장의 스쿠버는 LS전선의 수중사진 공모전으로, 서경배 회장의 미술품 수집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운영으로, 정용진 회장의 요리 취미는 신제품 개발 프로세스의 일부로 제도화됐다. 총수 개인의 관심사가 그룹 차원의 브랜드 자산이나 사업 아이템으로 전환된 사례가 반복되는 구조다.
재벌 총수의 취미가 기업 전략으로 이어지는 이유.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또한 취미는 비즈니스 네트워크의 비공식 통로이기도 하다. 미술품 경매장, 레이싱 서킷, 요트 클럽처럼 접근 자체가 제한되는 고비용 공간에서는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글로벌 정·재계 인사들과의 신뢰 형성이 빠르게 이뤄진다. 수조 원대 M&A나 전략적 제휴가 공식 회의실이 아니라 총수들의 사적인 취미 모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총수 개인의 심리 상태가 기업 지배구조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취미는 오너 리스크 관리 수단이기도 하다. 건전하고 몰입도 높은 취미는 총수가 파괴적인 일탈에 빠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일종의 심리적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이 회장의 슈퍼카 수집이나 구자균 회장의 스쿠버처럼 극도의 집중을 요하는 취미일수록 그 효과는 더 강하게 작동한다.

재벌 총수의 취미를 '돈 많은 이들의 여가'로만 소비하는 시각이 점차 설득력을 잃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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