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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경쟁 기술보다 법 설계가 우선, 제도 선점국이 승자
한국금융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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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욕에서 AI 관련 기업들과 미팅을 할 때마다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느껴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AI 기업들은 모델 성능이나 데이터 확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술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규제와 법적 구조에 대한 질문이 먼저 나온다. “이 기술은 규제 문제가 없을까요?” “데이터 사용에 법적 리스크는 없습니까?” 이제 AI 경쟁은 기술이 아니라 법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부의 지도는 재편되었다. 증기기관은 영국에 산업혁명을 가져왔고, 인터넷은 미국에 플랫폼 패권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세 번째 거대한 변곡점 앞에 서 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기술 경쟁에 주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법과 제도를 먼저 설계하는 국가가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기술이 시장을 만든다면, 법은 그 시장의 질서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질서를 설계하는 국가가 결국 경제적 주도권을 가져가게 된다.
▲ New York State Supreme Court courthouse at 60 Centre Street on Foley Square in the Civic Center district of Manhattan, New York City (사진: Wikipedia, By Beyond My Ken)
이 흐름은 뉴욕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뉴욕시의 AI 채용 규제법(Local Law 144)이다. 이 법은 기업이 AI를 활용해 채용이나 승진 결정을 내릴 경우 독립적인 기관으로부터 편향성 감사를 받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규제처럼 보이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기술에 대한 ‘품질 보증서’를 제공하는 제도다.

기업들은 법적 기준이 명확해지면서 소송 위험 없이 AI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관련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법이 기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채용과 같은 민감한 영역에서 AI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는 것은 산업 확산의 핵심 요소이며, 뉴욕은 이 신뢰 구조를 가장 먼저 설계하고 있다.
▲New York Skyline (사진: Pixabay)
두 번째로 주목할 사례는 뉴욕주의 ‘Empire AI’ 프로젝트다. 뉴욕주는 수억 달러 규모의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AI 생태계를 설계하고 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AI 인프라를 공공재로 활용하여 중소기업과 연구기관이 대기업의 자본에 종속되지 않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산업 구조 자체를 설계하는 정책적 접근이다. 뉴욕은 기술뿐 아니라 생태계를 설계함으로써 AI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려 하고 있다. 결국 AI 시대에는 특정 기업의 기술 경쟁력보다, 다양한 기업과 연구기관이 참여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정책 역량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EU (사진: Pixabay)
세 번째로 주목할 흐름은 유럽연합의 AI Act다. 유럽연합은 세계 최초로 포괄적인 AI 규제 체계를 도입하며 글로벌 기준을 선점하려 하고 있다. 이 법은 AI를 위험 수준에 따라 분류하고, 고위험 AI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제를 적용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글로벌 산업의 기준을 만드는 시도다. 실제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AI Act 기준을 맞추기 시작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글로벌 표준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 개인정보 보호 분야에서 GDPR이 글로벌 표준이 된 것처럼, AI Act 역시 글로벌 시장 질서를 재편할 가능성이 크다.

이 세 가지 사례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뉴욕은 기술에 대한 신뢰를 설계하고 있고, 뉴욕주는 산업 생태계를 설계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은 글로벌 규칙을 설계하고 있다. 기술 경쟁이 아니라 법과 제도 설계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실리콘밸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AI 기업들이 기술 개발과 동시에 법률 전문가와 정책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첫 번째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이 법학자들과 점심을 먹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법과 정책이 핵심 경쟁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은 반도체와 IT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기술 경쟁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이 성장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얼마나 빠르게 설계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동시에 대학과 연구기관 중심의 AI 정책 연구 역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AI 시대에는 기술 개발뿐 아니라 법과 정책을 연구하고 설계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기관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규제 논의를 넘어, 산업 전략을 설계하는 역할로 확장될 것이다.

AI 시대의 승자는 기술을 먼저 개발한 국가가 아니라, 글로벌 표준을 먼저 설계하는 ‘룰 세터(rule-setter)’가 될 것이다. 기술이 미래를 만든다면, 법은 그 미래의 부를 누가 가져갈지를 결정한다. AI 시대, 법을 먼저 설계하는 나라가 돈을 번다. 그리고 그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충북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고문변호사

미국 뉴욕주 프라이빗 웰스 로펌의 대표 변호사로 자산 구조와 투자전략 설계 전문가다. AI를 비롯한 IT 관련 법률 지식에 정통해 충북대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와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다.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개발사업과 글로벌 갤러리 운영도 하면서 다양한 사회·문화 활동도 하고 있다. 차세대 한인 리더로서 AI 시대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인프라를 구축해 입법·제도화한다는 비전을 갖고 오는 2028년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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