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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번따 성지 논란, 독서 에티켓 공지문 부착
위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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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러 갔다가 번호를 물어보는 일을 겪었다는 후기가 쏟아지고 있다.

조용히 머물며 책을 고르던 대형서점이 어느새 ‘번따 성지’로 불리기 시작했고, 결국 매장 안에는 독서 공간 에티켓 공지문까지 붙었다. 일부 이용자들은 “불쾌했다”를 넘어 “무서웠다”는 반응까지 내놓고 있다. 원래는 혼자 책을 읽고 쉬는 공간이었는데, 최근에는 누군가에게 접근할 상대를 찾는 장소처럼 소비되면서 논란이 커지는 분위기다.

최근 SNS에는 대형서점을 ‘번따(전화번호 따기) 성지’로 소개하는 영상과 게시물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특히 ‘교보문고 번따’ 같은 키워드가 붙은 콘텐츠는 이미 온라인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떠오르는 헌팅 명소”, “서점에서 번호 따는 법” 같은 제목을 단 영상도 퍼지고 있다. 일부 영상은 조회 수가 수백만 회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확산됐다. 조용히 책을 보는 공간이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만남’을 시도하는 곳처럼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관련 콘텐츠 수위도 가볍지 않다. 지난해 11월 올라온 한 유튜브 영상은 서점에서 처음 보는 여성의 번호를 묻는 법부터 이후 만남으로 이어가는 방식까지 소개했다. “대학생이냐”, “혼자 자주 오느냐” 같은 이른바 ‘번따 멘트’도 공유됐다. 문제는 이런 콘텐츠가 단순한 장난이나 해프닝처럼 소비되면서, 실제 서점 이용객들의 불편과 불안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책을 사거나 읽으러 간 공간에서 원치 않는 접근을 받는 일이 반복되면, 독서 공간 자체의 의미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서점 측도 이미 이 문제를 알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이런 ‘서점 헌팅’은 최근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SNS를 중심으로 퍼져 왔고, 고객 민원도 간간이 접수돼 왔다. 특히 최근 몇 달 사이에는 ‘챌린지’ 영상처럼 가볍게 소비되는 흐름까지 겹치며 더 크게 화제가 됐다. 서점에 건실하고 지적인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분위기가 맞물리며 이런 유행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실제 이용객 반응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난달 한 누리꾼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번호를 물어보길래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며 거절했는데, 이후로도 집요하게 쫓아와 도망치듯 서점을 나왔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한 번 거절했는데도 계속 따라오니 너무 곤란했고, 사람이 많은 공간인데도 무척 무서웠다”고 했다. 서점이라는 장소 자체가 주는 안정감 때문에 더 당황스러웠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상대에게는 위협과 공포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결국 서점 안에는 공지문까지 붙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매장 곳곳에는 ‘독서 공간 에티켓’ 안내문이 비치됐다. “소중한 독서의 순간이 낯선 대화나 시선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해달라”는 내용과 함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이용이 불편할 경우 가까운 직원에게 문의해 달라는 문구가 담겼다.

교보문고 측은 해당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매장 내 “몰입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안내 표현 역시 이런 상황을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점이 누구나 드나드는 개방된 공간이어서 특정 행위를 일일이 직접 제지하기는 어렵지만, 이용객이 불편을 느끼면 현장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왜 하필 서점이 이런 장소가 됐을까. 연합뉴스에 따르면 최근 ‘텍스트힙’, ‘패션독서’ 같은 유행으로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는 곳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소비되고 있다. 책을 읽는 취향, 머무는 방식, 고르는 책까지 하나의 이미지처럼 여겨지면서 일부는 이를 이성 간 만남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서점이 책을 매개로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주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상대에게 더 쉽게 호감을 느끼고 신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유사성’이 관계 형성에 대한 기대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기대가 상대의 동의보다 앞설 때다. 서점은 누군가를 관찰하고 말을 거는 공간이 아니라, 책과 독서에 몰입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우선돼야 한다. 조용해야 할 장소에 ‘독서 공간 에티켓’ 공지문까지 붙었다는 사실은, 이미 선을 넘었다는 뜻에 가깝다.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헌팅 성지’가 아니라,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책을 고를 수 있는 서점을 되돌려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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