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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미래 설계, 선전 기술 도입 테스트베드 비교
아주경제
세계를 이끄는 두 나라의 기술 심장부라는 점에서 한국의 판교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규모와 밀도에서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기자가 느낀 건 단순한 규모 차이가 아니었다. 기술을 만드는 방식, 기술을 살아내는 방식, 그리고 그 기술이 축적되는 사회의 결이 서로 달랐다.
◆ 실리콘밸리, 구글 옆 동네 마트엔 여전히 현금이 오간다
실리콘밸리는 말 그대로 미래를 설계하는 곳이었다. 참고로 실리콘밸리는 행정구역이 아니다. 산타클라라·산호세를 포함한 남부의 반도체·하드웨어 기업군, 스탠퍼드대를 중심으로 한 구글·애플·메타·엔비디아·인텔·시스코·어도비·이베이·넷플릭스 등의 빅테크 본사, 북쪽 샌프란시스코 일대 유니콘 기업들까지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 개념이다. 산타클라라 카운티 하나에만 약 6,500개의 하이테크 기업이 밀집해 있다. AI·반도체·클라우드 등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기술이 이곳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이 혁신의 성지에서 정작 현지인들의 일상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아날로그적이었다. 대부분 건물은 5층 이하로 낮았고, 쇼핑몰이나 복합문화공간보다는 단층 개별 건물들이 넓은 땅에 펼쳐진 낮은 스카이라인이 인상적이었다. 새너제이 랜드마크라는 10층 규모의 삼성전자 디바이스 솔루션(DS)부문 미주총괄(DSA) 옥상에서는 그 일대 360도 올라운드 뷰가 가능할 정도다.
도로 위는 내연기관차가 주류였다. 시민들은 나지막하지만 넓게 지어진 월마트·트레이더조·타겟 같은 대형마트에서 직접 장을 봐 요리해 먹는 전통적인 미국식 생활을 유지하는 듯 보였다. 길거리엔 낮에도 행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인종 도시답게 차량 호출 서비스 우버(Uber) 기사들의 출신지도 다양했다. 어떤 기사는 날씨나 출신지를 묻는 스몰토크를 건네왔고, 어떤 기사는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기사도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마트나 식당 결제는 모두 카드와 현금 중심이었고 앱 결제는 없었다. 배달 오토바이는 보기 어려웠다.
숙소 TV를 켜니 정극 중심의 드라마가 메인 프로그램인 듯 보였고, 자동차 광고가 많았다. 마치 한국의 2000년대 초반을 닮은 구성이었다. 선전 위성TV에서 뉴스·드라마·예능·시사·재정 프로그램이 빠르게 뒤섞이던 것과는 결이 달랐다.
산타클라라 마운틴뷰에 있는 구글 본사엔 모기업 알파벳의 자회사 '웨이모(Waymo)' 자율주행 차량이 즐비했지만 일상에선 보기 어려웠다.
드론도 마찬가지다. 알파벳 산하 '윙(Wing)'이 베이 에어리어 일부 주거지에서 드론 배송 실험을 확장하고는 있지만, 도시 전반에서 체감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첨단 기술은 존재하지만 생활 속 침투 속도는 제한적인 것이다.
미국인들 그 대신 오랜 시간 누적해 쌓은 특유의 여유롭고 익숙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는 미래를 설계하지만 생활은 익숙한 현재에 머무르는 공간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테크 본산임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 어느 곳에서도 감시카메라(CCTV)를 많이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첨단의 정점을 달리지만 일상과 거리를 둔 채 자유로움이 보장된 느낌이랄까, 알 수 없는 개방감은 이곳이 왜 자유의 나라 미국인지 실감하게 했다.
◆ 선전, 어촌 마을에서 테크 수도로…중간을 건너 뛴 도시
반면 선전은 차원이 다른 속도감이었다. 실리콘밸리가 세계 최고의 기술을 창출하지만 실생활과 이원화됐다면 선전은 그 기술을 빠르게 도입해 일상에 적용하는 거대한 빅데이터 테스트베드였다.
1980년 덩샤오핑의 경제특구 지정 이전만 해도 인구 3만여 명의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선전은 과거의 낙후한 생활상을 밀어내고, 개발도상국이 보통 거치는 긴 과정을 생략한 채 미래로 곧장 건너뛴 도시처럼 보였다.
화웨이·텐센트·샤오미·OPPO 등 중국을 대표하는 인터넷·스마트폰 기업 본사가 이 도시에 밀집해 있고, 전기차 세계 1위 비야디(BYD), 전 세계 드론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DJI도 이 땅에서 태어났다. 실리콘밸리가 구글·엔비디아·애플을 품은 것처럼, 선전 역시 중국 기술의 심장부다.
선전 거리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은 전기차였고, 전기 바이크는 100% 전동화돼 공기가 깨끗했다. 바로 아래 홍콩이 독일·일본산 내연기관차 일색이어서 매연에 갇힌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거대한 쇼핑몰과 마천루가 도심을 가득 채우고, 배달 오토바이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도시를 누볐다. 플랫폼 기반 소비가 생활의 기본 단위로 자리 잡은 것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과일을 파는 노점상도 QR코드로 결제를 받는다는 점이었다. 위챗페이와 알리페이가 장악한 모바일 결제는 현금과 카드의 자리를 완전히 밀어냈다. 이제 중국에서 '인민폐'는 일상에서 활용도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중국 전체 결제에서 QR코드 기반 모바일 결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육박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선전의 노점상 앞에서 QR코드를 스캔하는 순간, 결제는 단순한 지불 행위가 아니라 도시 질서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차 안 풍경도 달랐다. 선전에서는 중국판 우버인 디디추싱(滴滴出行·디디)을 사용했는데, 차량은 거의 예외 없이 중국산 전기차였다. 인상적이었던 건 기사들의 차량 활용 방식이었다. 대형 'IVI(In-Vehicle Infotainment)' 시스템, 이른바 차량용 통합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은 기본이었다.
더 눈길을 끈 건 주행 중 메신저 앱 사용 방식이었다. 손으로 타이핑하는 대신 앱을 켜놓은 채 음성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마치 전화 통화를 하듯 앱과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운전 중 스마트폰을 손으로 조작하지 않고 음성 인터페이스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광경은 기술이 운전자의 생활 습관 깊숙이 녹아든 결과처럼 보였다.
선전에서 드론은 더 이상 관광용 볼거리가 아니다. '드론의 수도'라는 대명사답게 드론 운행 노선만 207개 선, 이착륙장은 249곳에 달한다. 롄화산 공원, 선전만 베이완 루강, 하이펑 스포츠공원 등 주요 공원에서 음식·음료·일용품을 드론으로 배달받을 수 있다.
배달 앱 메이투안은 선전 중심공원에서 밀크티·버거 등 수천 가지 제품을 10분 만에 드론으로 배송하는 서비스를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DJI 본사가 있는 도시답게 드론은 이미 일상의 인프라였다.
실리콘밸리 택시 기사들이 다양한 출신배경을 지녔다면 선전 택시 기사들은 중국 대륙 곳곳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다. 원래 광둥어 지역인 선전에서 보통화(만다린어)로 말을 걸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국 대륙 인력이 몰려드니 집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선전의 집값이 홍콩을 넘어섰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로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미래로 이동한 이 도시가 이제는 바로 옆 홍콩의 상징적 지위마저 뒤흔들고 있는 셈이다.
도시 전체가 신기술을 빠르게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빅 브라더'의 영향력이 그만큼 세다는 의미일 것이다.
선전에서 느낀 '감시의 밀도'는 차원이 달랐다. 도심 골목마다, 쇼핑몰 입구마다, 심지어 공원 곳곳에도 CCTV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안면인식 기술이 결합된 이 감시망은 치안 유지를 넘어 도시 운영 시스템의 일부처럼 작동하는 인상이었다. 기술이 일상에 깊숙이 침투할수록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데이터 수집과 통제의 인프라도 함께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 설계도와 테스트베드, 두 도시가 던지는 질문
두 도시의 대비는 단순히 정치 체제나 문화 차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두 패권국이 테크 수도를 디자인하는 방식은 AI 시대를 맞아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를 품고 있다.
실리콘밸리 모델은 이렇다. 전 세계 천재들이 몰려들어 미래를 설계한다. 오픈AI·구글 딥마인드·앤스로픽 등 AI 핵심 연구소가 모여 있고, 가장 앞선 알고리즘과 반도체가 이곳에서 탄생한다. 이 모델의 강점은 혁신의 원천 그 자체다.
선전 모델은 다르게 작동한다. 화웨이·텐센트·BYD·DJI가 만든 기술은 곧바로 수천만 명의 일상에 적용된다. QR 결제, 드론 배달, 전기차, CCTV 연동 안면인식 등 모든 것이 도시 전체를 거대한 AI 학습 환경으로 만든다.
기술이 생활에 빠르게 침투할수록 그 과정에서 쌓이는 데이터의 양과 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AI는 결국 데이터로 학습한다. 선전식 모델이 AI 시대에 갖는 잠재적 경쟁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 데이터가 어떻게 쓰이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CCTV가 깔린 거리, 중앙화된 결제 시스템, 모든 행동이 플랫폼 위에 기록되는 구조는 편리함과 동시에 감시와 통제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실리콘밸리의 느린 기술 침투 속도가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측면도 있다. 혁신의 원천이 창의성이라는 점에서도 일사분란함 보다는 느긋함이 낫다.
◆ 누가 기술을 만드느냐, 누가 먼저 기술을 사느냐
두 도시를 관통하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기술 패권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여전히 세계 기술의 설계도다. 그러나 선전은 그 설계도를 현실로 구현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새로운 데이터를 쌓아 또 다른 기술을 진화시키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하나는 미래를 만들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산다. 어느 모델이 더 나은지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다. 두 도시 모두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