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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등 상장사, 이사 시차임기제로 집중투표제 무력화 시도
웰스매니지먼트정관 제25조에서 "이사의 임기는 3년으로 한다"를 "이사의 임기는 3년을 초과하지 못한다"로 바꾸는 게 전부이니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그 차이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임기를 고정하지 않으면 이사마다 1년, 2년, 3년 짜리를 섞는 '시차임기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시차임기제가 작동하면 매년 임기가 만료되는 이사 수가 줄어 최근 상법 개정으로 도입된 집중투표제 실효성이 사실상 소멸될 수도 있다.
한국거버넌스포럼은 최근 논평을 내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주요 상장사들이 개정 상법을 무력화하기 위해 잇달아 정관 개정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금융 당국이 기업 가치를 높이겠다며 상법을 개정하자 상장사들은 일반 주주의 힘을 빼는 전략으로 우회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상법 개정의 취지를 피하기 위한 꼼수를 알려주는 전문가를 가장한 '법기술자'들이 있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첨부파일 : 표_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분석한 주총소집 공고 밎 정관 개정안.pdf
삼성전자부터 오뚜기까지…20사 넘게 ‘시차임기’ 추진
국회는 지난해부터 세 차례에 걸쳐 상법을 개정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 전자주주총회 도입 등이 핵심 사안이다. 이 가운데 집중투표제는 오는 9월부터 대형 상장사에 의무 적용될 예정이다. 집중투표제란 주주가 자신의 의결권을 한 이사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는 제도다. 소수주주가 이사회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이사를 진입시킬 수 있는 사실상 통로로 작동할 것이란 기대가 컸다.
집중투표제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동시에 교체되는 이사 수가 많아야 한다. 이사를 동시에 여러 명 뽑을수록 소수주주가 의결권을 집중시켜 1석을 확보할 확률이 높아져서다. 그러나 시차임기제는 이 전제를 무너뜨리는 셈이다. 매년 교체되는 이사 수를 1~2명으로 줄이면 집중투표를 하더라도 소수주주가 이사를 선임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이번 주총 시즌에 삼성전자와 유사하게 이사 임기 다양화를 위한 정관 개정안을 올린 기업은 20개사가 넘는다. 삼성SDS, 오뚜기, LS일렉트릭, 한화솔루션, 효성중공업, 효성티앤씨, 녹십자, 녹십자홀딩스, 영원무역, 파라다이스, 종근당, 하이트진로 등 주요 기업 상당수가 포함됐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코스피200·코스닥150 구성종목 330개사의 주총 소집공고를 전수 분석한 결과, 코스피 21개사와 코스닥 2개사가 이사 임기를 '3년 이내'로 바꾸는 정관 변경안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기업은 정관 개정에 대해 '임기 유연화', '조문 정비' 같은 추상적 문구만 제시하고 왜 상법 개정 직후에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임기 변경만이 아니다. 이사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정관을 바꾸는 행태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사 수를 줄이면 집중투표제가 실시되더라도 소수주주가 이사를 선임하기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는 걸 이용한 전략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에 따르면 코스피 25개사, 코스닥 7개사가 이사 수 상한을 낮추거나 신설하는 정관 변경안을 올렸다. 카카오는 이사 상한을 11인에서 7인으로, 셀트리온은 15인에서 9인으로, LS일렉트릭은 9인에서 5인으로 줄이는 안건을 상정했다. 효성중공업은 16인에서 9인으로, 효성티앤씨도 16인에서 9인으로 각각 축소한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한진칼, HS효성첨단소재 등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는 "정관으로 이사의 수 상한을 신설하거나 축소하는 안건의 경우, 일반주주의 주주제안 및 집중투표제 청구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반면 정관 변경을 하지 않아도 적정 이사회 규모로 운영이 가능한 점을 감안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도 정관 개정해 ‘우회’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를 우회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개정 상법은 자기주식을 의무적으로 소각하도록 했지만 코스피 27개사와 코스닥 38개사가 '경영상 목적'으로 자기주식을 소각하지 않고 보유·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 조항을 정관에 새로 넣는 안건을 올렸다.
문제는 '경영상 목적'의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은 '전략적 제휴' 명분으로 자기주식을 우호세력(백기사)에게 처분할 근거를 뒀고, SK하이닉스, CJ, CJ대한통운, 롯데쇼핑, 롯데지주, 넷마블, 엔씨소프트 등도 비슷한 내용의 정관 변경을 추진 중이다.
국민연금은 이 같은 정관 개정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 규정을 우회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기업의 지분구조상 최대주주의 찬성만으로 자기주식 보유·처분 계획이 주주총회에서 승인될 수 있는지, 일반주주의 의견을 반영할 방안이 마련되어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효성중공업과 효성티앤씨는 이사 자격요건을 정관에 신설하는 안건까지 만들었다.효성중공업은 '그룹사 3년 이상 경력' 또는 '재임 이사 3분의 1 추천'을 이사 후보의 필수조건으로 제시했고, 효성티앤씨도 '그룹사 3년 근무' 또는 '재직 이사 3분의 1 추천'을 의무화했다.
이 조항이 주총을 통과하면 소수주주나 외부 기관이 추천하는 독립적 이사 후보는 재임 이사들의 동의 없이 후보에 오를 수조차 없게 된다. 기존 이사회가 후계를 선택하는 '자기 반복적 이사회'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런 상장사들의 움직임에 대해 국민연금은 이번 주총 시즌부터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에 폭넓게 공개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지분율 10% 이상 보유 기업에 한해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 공개했지만 앞으로는 지분율 5% 이상 보유 기업으로 대상을 확대한다는 것.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가 수백 곳에 달하는 만큼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연금은 전자주주총회를 정관으로 배제하는 안건도 "원칙적으로 반대한다"고 밝혔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이 참에 아예 더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개선을 촉구했다. 미국 대부분의 상장사는 이사 임기를 1년으로 하고 매년 전체 이사를 재신임한다. 일본도 도쿄증시 프라임 시장에 상장된 소니, 토요타, 히타치 등 대기업은 위원회 설치형 회사 형태로 이사 임기 1년을 채택하고 있다.
거버넌스포럼 측은 "적어도 상장회사에 대해 이사 임기를 1년으로 해 매년 주주들로부터 재신임 받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며 "거래소가 표준정관으로 정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거버넌스포럼은 삼성전자 신제윤 이사회 의장과 김준성, 허은녕, 유명희, 조혜경, 이혁재 등 5명의 독립이사를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이사의 임기 조문 정비 관련 정관 변경을 결의한 이유를 밝히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한 개정 상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점 때문이다.
포럼 측은 삼성전자 이사회가 100% 한국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10명의 이사 가운데 사내이사는 CEO 1명이고 독립이사 7명 중 6명이 외국인인 대만의 TSMC와 극명하게 대비된다며 글로벌 기업의 이사회를 벤치마킹할 것을 주문했다.
400
만 소수주주, 50% 지분 보유한 외국인투자자, 8% 보유한 국민연금이 주시하는 가운데 오는 18일 삼성전자 주주총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주목된다. 이외에 잇단 상장사들의 정관 개정 움직임에 어떤 제동이 걸릴지에 투자자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