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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 작가, 일흔에 느끼는 열일곱의 열정과 성찰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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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저무는 햇살이 책상 위 노트북을 비스듬히 적신다. 빛은 하루의 끝자락에 와서야 부드러워진다. 사람 또한 삶의 황혼에 접어들 즈음에야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거울 속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며 생각한다. 인생은 어디쯤 와 있는가, 가슴속에서 여전히 뛰고 있는 뜨거운 심장은 몇 살의 온도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김창완의 신곡 ‘세븐티(seventy,70)'가 귓가에 맴돈다. ‘일흔 살이 이렇게 가벼운지 몰랐네. 떠가는 구름, 해 질 녘 풍경… 내가 걷던 길에 칠십 년이 있었네.’ 읊조리듯 담담하게 토해내는 노랫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들어 먼 산을 쳐다본다. 이순을 지나 고희의 고개를 넘다 보니, 일흔이 가볍고도 가까운지 몰랐다는 그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거울 앞의 나는 분명 세월의 흔적이 스친 모습이고 노래처럼 어깨의 짐은 한결 가벼워졌건만, 가슴에서 요동치는 심장의 뜨거움은 열일곱(seventeen) 살 무렵과 다르지 않다.
가슴 깊은 곳에는 아직 식지 않은 맥박이 또렷이 뛴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되살아난 불씨와도 같다. 돌이켜보면 세월의 강물은 무심히 흐르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그 시절의 열정은 맹렬히 타오르는 활화산 같았다. 푸른 작업복을 입고 공업고등학교 실습장에서 정성을 다해 용접하고 쇠를 깎으면서도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듯 기세등등했다. 불꽃이 튀는 작업대 앞에서 손등이 그을려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던 날들이었다. 친구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이 넓은 무대는 결국 우리 차지가 될 것처럼 허세 어린 꿈을 키우곤 했지만, 시선은 오직 ‘나’라는 좁고 선명한 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거칠고 뜨거웠던 패기는 굽이치는 세월의 강물에 휩쓸려 사그라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 안의 열일곱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다. 세월의 결을 따라 뜨거움의 방향과 형태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등단한 지 어언 십여 년, 매일같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다듬는 일상은 이제 삶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되었다. 열일곱의 열정이 닥치는 대로 태워버리는 거친 불꽃이었다면, 일흔의 정열은 화로 속에서 은은하지만 오래도록 달아오르는 숯불과 같다. 원고에서 한 단어를 덜어내고 쉼표 하나의 자리를 옮기는 동안 불꽃이 아니라 숯처럼 오래 타는 인내를 배운다. 젊은 날의 열기와는 달리, 오늘의 글쓰기는 책임과 무게로 다가온다. 뾰족한 ‘점’의 시선은 마침내 세상을 향해 길고 단단하게 뻗어가는 ‘선’이 되었다.
수필을 쓴다는 것은 타인의 삶에 스며들기 위한 쉽지 않은 여정이다. 삶의 결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살피고 출처를 확인한다. 이런 과정은 성급함을 덜어내고 사유의 속도를 늦추게 한다. 합평하고 퇴고하는 일은 표현을 매만지는 작업이기보다, 마음의 각을 둥글게 다듬는 시간에 가깝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읽는 이의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닿기 위한 노력이다. 때로는 한 문장을 넘기기 위해 며칠을 붙들거나 잠자리에서 불현듯 생각이 떠올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기도 하지만, 더딤 속에서 글은 숨을 얻는다. 일흔의 삶이 때로는 홀가분해 보일지라도, 책상 앞에서 문장과 씨름하는 동안의 펄떡이는 맥박은 열일곱 살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글쓰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고요했던 서재의 공기를 뒤로하고 길 건너 딸네 아파트로 향하는 발걸음은 저녁 바람처럼 가뿐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훌쩍 자란 초등학생 손주들이 까르르 웃으며 품에 안긴다. 거실을 운동장 삼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서로 쫓고 쫓긴다. 뿜어내는 아이들의 맑은 에너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두려움도 모른 채 세상을 향해 달려나가던 열일곱이 떠오른다. 내 안에서 요동치던 열정도 저토록 청량하고 맹렬하지 않았을까.
뾰족하던 열일곱의 ‘점’은 세월을 건너 단단한 ‘선’이 되었고, 어느덧 아이들이 기대어 설 수 있는 따뜻한 ‘면’으로 넓어졌다. 일흔의 고개에 이르러 다시 바라본 열정은 더는 나만을 향해 있지 않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과 호기심 속에서 오히려 삶을 다시 배우고 있다. 그제야 걸어온 길 위에 켜켜이 쌓인 칠십 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열일곱이 부럽지는 않다. 다만 오십여 년 전 가장 눈부신 얼굴로 내게 와 주었던 청춘이 고마울 뿐이다. 그 불씨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열일곱의 심장으로 펜을 들고, 일흔의 품으로 가족과 세상을 넉넉히 안을 수 있는 지금, 돌아보면 세월은 참으로 감사하고 눈부시다.
오늘도 다시 노트북을 편다. 일흔의 느슨해진 어깨로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담담히 받아 안고, 열일곱의 뜨거운 심장으로는 아직 쓰지 않은 내일의 문장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딘다. 더는 누군가를 앞서기보다, 품어주는 법을 키운다. 세월은 늙게 하려 흐른 것이 아니라, 나를 넓히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오늘은 일흔으로 서 있지만, 가슴 깊은 곳의 울림은 오래전의 박동과 다르지 않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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