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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동반자 [조남대의 은퇴일기(93)]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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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집 뒤편에는 삼백 년을 버텨온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풍성한 자태로 먼저 눈에 띄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상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할 만큼 세월과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나에게는 행정적인 명칭보다 오래된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마을 뒷산에 자리한 8대조 이하 선조들의 산소를 생각하면, 이곳에 터를 잡으며 심었을지도 모른다.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집안의 역사와 숨결을 함께 나누어 온 어른 같은 존재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은행나무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관계의 끈이 당연하게 이어졌다고나 할까. 어머니는 수시로 나무 아래에 소박한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치성을 드렸다. 주변에 성스럽게 흐르던 공기가 아직도 또렷하다. 뜻깊은 날이면 마을의 중요한 일은 나무 언저리에서 이루어졌다. 단오가 되면 동네 청년들이 굵은 동아줄을 꼬아 그네를 매달았다. 아낙네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하늘 높이 오르내리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가장 높이 치솟는 순간이면 보는 이들의 숨이 함께 멎었다가, 발끝이 땅을 스칠 즈음 모두가 안도의 표정

지었다. 기다리던 아이들은 차례를 재촉하며 발을 동동 굴렀고, 어른들은 그늘에 둘러앉아 부채를 부치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넓은 나무 아래 모여 제기차기나 숨바꼭질을 하거나 옆으로 길게 늘어진 가지에 매달려 놀았다. 은행나무는 늘 넉넉한 품으로 받아주었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단풍은 온 동네를 금빛으로 덮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사람들은 새벽같이 나와 은행을 주웠다. 껍질을 깔 때 고약한 냄새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화롯불에 구운 노란 은행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귀한 간식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따뜻함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나무의 은혜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서로 웃으며 나누든 정겨움은 나무가 빚어낸 또 하나의 풍경이었다. 은행나무는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객지로 나가 공부하며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걸을 때면 문득 고향의 은행나무가 떠올랐다. 빽빽한 건물 사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넉넉한 그늘과 바람의 향기가 그리웠다. 힘든 날이 이어질수록 그곳에서 뛰놀던 기억이 건조해진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가끔 고향에 들를 때면 은행나무부터 찾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품어주었고,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은 따뜻했다. 긴 시간 떨어져 있었음에도 변함없이 나를 알아보는 것만 같았다. 나무 앞에 서면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스르르 풀렸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마을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은행나무도 위기를 맞았다.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말이 돌았을 때, 오래된 가족을 잃을 것 같은 불안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은행나무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보존하는 조건으로 공단 측과 양도계약서를 맺었다. 지금은 주변이 조그만 공원으로 조성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옆으로 도로가 나고 공장이 들어서면서 은행나무는 공단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예전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새벽에 은행을 줍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사라졌다. 고향에 들를 때마다 쓸쓸히 서 있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얼마 전에 시청에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쉴 수 있는 벤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봄이 되면 설치하겠다는 답변을 들었을 때, 오랜 친구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한 것처럼 기뻤다. 날이 포근해지면 공단 직원들이 점심 후 커피를 들고 찾을 것이다. 외로움을 벗은 나무가 다시 건강한 녹음을 펼칠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칠십을 넘기며 세월의 무게에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고, 걸음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오래된 가지가 부러져도 새순을 틔우며 푸르

을 잃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생명의 끈질김과 세월의 깊이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언젠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줄어든다 해도, 은행나무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먼 훗날 조상들이 묻힌 뒷산에 누울 날이 오더라도, 그대로 서 있을 거라 생각하면 친구가 옆에서 지켜주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나무는 내가 살아온 시간을 기억해 줄 마지막 증인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찾지 않는다 해도 은행나무는 제자리에서 묵묵히 계절을 건널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고, 낯선 이들이 다시 이 마을의 주인이 되는 동안에도 그 곁을 지키며 시간을 품어 안겠지. 해마다 노란 잎을 쏟아내며 마을의 기억을 덧입히는 존재, 사람들의 삶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조용히 이어 붙이는 푸른 이음매로 남기를 바란다. 비바람에 몸을 휘어도 뿌리로 버티고, 상처 입은 자리마다 다시 숨을 틔우는 생명으로 오래 곁에 서 있기를 소망한다. 스쳐 가는 이의 눈길이 잠시 머물고, 이유 없이 마음이 밝아지는 그런 나무, 말없이 등을 내어주는 벗으로 남아 주었으면 한다.
은행나무는 단지 오래된 보호수가 아니다. 어린 시절을 품어주었고, 타향살이 외로움의 의지처가 되었으며, 돌아갈 고향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묵묵히 곁을 지키는 일생의 동반자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그 나무는 다음 세대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네지 않을까. 인연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시간 또한 거목의 나이테 속 어딘가에 조용히 새겨져 있을 것만 같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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