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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가 사라진 밤 [정명섭의 실록 읽기㉚]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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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재위에 오른 지 14년째 되던 해인 서기 1519년 11월 15일 저녁,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승지인 윤자임과 공서린은 경복궁에서 숙직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나갔다가 놀랄만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횃불을 들고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서 들어온 군사들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놀란 윤자임이 다가가니 병조판서 이장곤을 비롯한 관리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윤자임이 밤중에 어쩐 일이냐고 묻자 이장곤은 임금이 불렀다고 대답한다. 잠시 후, 내전에서 승지가 나와서 병조참지 성운에게 새로 승지로 임명됐으니 들어와서 어명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윤자임이 항의했지만 쫓겨나고 만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성운은 종이쪽지를 내밀면서 말한다.

“여기 적힌 사람들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시키라는 어명이 내렸소.”
종이에 적힌 명단에는 윤자임과 공서린은 물론 대사헌 조광조와 그를 지지하던 사림파 관료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벌어진 이 기묘한 일은 그해의 간지를 따서 기묘사화라고 불린다. 한때,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조광조는 한순간에 몰락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교로 삼았고, 많은 유학자가 탄생했다. 그들 중에 가장 돋보인 존재는 단연코 조광조일 것이다. 중종의 총애를 받던 그는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서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알려졌다. 덕분에 조선시대 내내 추앙 받았다. 최근에는 지나치게 경직된 그의 사고방식과 몇 가지 정치적인 실수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탄생과 등용, 그리고 몰락은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먼저 그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훈구파와 사림파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대개 조선의 건국에 협조하고, 세조의 찬탈에 동조한 기득권을 훈구파로 분류하고, 사림파는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세력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고려 후기 기득권을 장악한 호족 세력에 맞서서 도전한 것이 바로 훈구파에 해당되는 사대부들이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전자가 챔피언이 된 셈이다. 성종 시기부터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양측의 갈등이 터진 게 바로 연산군 시기에 벌어진 무오사화였다. 하지만 사림파는 연거푸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력을 넓혀갔다. 조광조는 이런 사림파의 상징 같은 존재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5대조인 조온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을 쌍성시절부터 따른 개국 공신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구분점이 얼마나 흐릿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1482년 용인에서 태어난 조광조는 어린 시절, 평안북도 희천군에 있는 역을 관리하는 찰방에 임명되어서 임지로 떠난다. 조광조는 아버지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배를 온 운명의 스승 김굉필을 만난다. 무오사화에 휩쓸려서 유배를 온 김굉필의 제자가 된다. 김굉필은 얼마 후 유배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갑자사회에 연루되어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조광조에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조광조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살 때 성균관에 입학한다. 그리고 뛰어난 실력과 특이한 행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천재들이 모인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여름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방 안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다른 유생들에게 괴짜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으며 심지어 모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중종 5년 10월 10일자 실록의 기사로 사신은 실록을 쓰는 사관을 뜻한다. 사관이 개인 의견을 적은 부분인데 관료들이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비난하면서 처벌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아마 이때부터 눈에 띄는 행동으로 적지 않은 사람의 미움을 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력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중종 10년인 1515년,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이 시기는 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고 10년이 지난 시점으로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을 비롯한 주축 세력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이들에 의해 아내 신씨와 강제로 헤어져야만 하는 등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를 위해 측근이 필요했는데 조광조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마자 폐비 신씨의 복권을 주장했다가 유배형에 처해진 박상과 김정이라는 관리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몇 달에 걸린 소란 끝에 결국 조광조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그는 조정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리고 도교와 관련된 관청인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하고,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과거제 대신 어진 사람을 추천하자는 추천제인 현량과를 시행한다. 그 과정에서 중종과의 갈등이 심해진다.

사실 중종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조광조라는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광조는 조선에 성리학을 뿌리내리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양쪽의 충돌은 조광조가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신들 중 가짜가 있다면서 이들을 골라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폭발해 버린다. 사실 공신들의 책정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서 반정 직후에 불만들이 터져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공신들을 명단에서 삭제한다는 말은 중종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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