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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르는 어둠, 무명의 영화들이 당신에게 말을 거는 곳 [공간을 기억하다]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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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영화관 탐방기방기㉜]

이제훈, 홍사빈도 방문한 강릉의 작은 공간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2021년 강릉의 한 골목, 다락방처럼 작은 공간 하나가 문을 열었다. 이름은 무명. 지금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들 역시 장편과 상업영화에 이르기 전, 단편영화라는 문턱을 지나왔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공간은,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됐다. 무명은 단편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으로, 강릉의 오래된 골목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영화관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집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도 이 공간의 첫 인상이다. 낮은 천장과 다락방 구조, 벽을 채운 영화 포스터와 소파, 은은한 조명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일반적인 극장과는 다른 결을 가진다. 계단을 올라 닿는 이 공간은 자연스럽게 관객의 발걸음을 늦추고, 문을 닫으면 바깥의 소음과 일상은 잠시 멀어진다. 그렇게 무명은 강릉의 골목 한 켠에서, 영화를 마주하는 또 하나의 방처럼 존재하고 있다.

6년 째 무명을 지키고 있는 신원덕 대표는 강릉에서 매년 열리는 정동진독립영화제에 참여하며 이 공간을 떠올렸다. 영화제에서 만난 단편영화들이 한 번 상영되고 사라지는 데서 느낀 아쉬움, 다시 보고 싶어도 찾을 수 있는 상영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뛰어든 길이었지만, ‘단편영화’라는 생소한 장르를 관객에게 건네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무명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이 자리를 잡기까지, 때로는 관객의 낯선 시선과 날 선 반응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하는 시간도 있었다.

"처음엔 저도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어요. 초창기에는 강릉에서 만들어진 단편영화만 상영했는데, 솔직히 관객분들 반응이 쉽지 않았죠. 환불해 달라는 분도 계셨고, 보다가 중간에 나가버리는 분도 계셨거든요. '아, 영화 구성을 좀 바꿔야겠다' 싶어서 전국에서 제작된 다양한 영화들, 해외 단편들까지 가져오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난관에 부딪히면서 하나씩 배워오고 성장한 것 같아요."

2월의 기획전 주제는 '그럼에도 기대어야 하는 우리들'이다. 정수진 감독의 '어푸어푸', 황지완 감독의 '4000BPM', 정치헌 감독의 '팔용산 엑스칼리버', 윤혜영 감독의 '로얄 팰리스 센트럴 주차장', 남서장 감독의 '올며 여짜오되', 서예인 감독의 '살처분'까지 총 여섯 편의 단편영화가 상영 목록에 올랐다. 저마다 다른 얼굴과 리듬을 가진 이야기들이지만, 결국 끝내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말해주는 작품들이다.

무명이 강릉의 골목을 지키는 방식은 작품을 현재로 연결하는 것이다. 흩어져 있던 단편영화들을 찾아내 다락방이라는 공간의 맥락 속에 다시 놓아주는 일은, 무명이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주제를 정해요. 예를 들어 '인권'이 주제면 장애인 인권을 다룬 단편들을 배급사나 감독님 DM을 통해 직접 선정하죠. 요즘은 관객분들 눈높이가 높아서 선택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기준은 러닝타임이 제일 중요해요. 30분에서 40분 사이가 베스트고요. 가족 단위 관객도 많아서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것, 공포 영화는 배제하는 편이에요. 드라마, 멜로, 코미디 위주로 고르고 정치적 색깔은 절대 넣지 않습니다."
집에서 버튼 하나로 영화를 재생할 수 있는 시대에, 무명은 역설적으로 관객의 속도를 늦추는 방식을 택했다. 더 많은 관객을 들여 수익을 내는 효율 대신,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영화와 온전히 대면할 수 있도록 ‘100% 예약제’라는 엄격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자리를 확보하는 절차를 넘어,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여운을 충분히 곱씹을 수 있는 밀도 높은 시간을 선물하기 위한 무명만의 약속이다.

"저희는 무조건 예약제로만 운영해요. 돈을 벌 목적이면 불특정 다수를 계속 받으면 되지만, 그러면 관객분들께 실망을 드릴 것 같더라고요. 영화 한 편 보고 바로 가시는 게 아니라, 영화를 곱씹어 볼 수 있게 1시간 정도 시간을 더 드려요. 공간이 세 곳 정도 있는데, 한 명의 관객이라도 그 공간을 온전히 내어드립니다. 거기서 오늘 본 영화를 천천히 생각해보시라는 의미죠."

공간이 지닌 물리적 한계는 무명에 이르러 오히려 독보적인 색깔이 된다. 매끄럽게 잘 닦인 멀티플렉스의 복도 대신, 낡은 구옥 골목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닿는 이 작은 다락방은 관객에게 영화를 보는 행위 그 이상의 생경한 감각을 일깨운다.

"저희 공간은 일반 극장이랑 비교하면 많이 불편해요. 외부 계단을 타야 하고 다락방이라 좁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불편함이 없었으면 저희는 일찍 문 닫았을 것 같아요. 넷플릭스나 왓챠로 편하게 볼 수 있는 시대에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시는 이유는, 강릉 구옥 골목의 다락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감성'과 '불편한 감각'을 즐기러 오시는 거거든요."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무명의 진심은 뜻밖의 응원을 만나 더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배우 이제훈이 자신의 채널 '제훈씨네'를 통해 전국의 작고 소중한 영화관을 조명하며 이곳을 소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영화를 향한 순수한 애정이 맞닿은 만남을 통해 더 많은 관객과 연결될 수 있었다.

"이제훈 씨가 직접 오고 싶다고 연락을 주셔서 방문하셨는데, 그때부터 공간이 360도로 변했어요. 묵묵히 해나가니까 이런 결과가 있구나 싶었죠. 이제훈 씨가 워낙 영화광이라 애정이 대단하시더라고요. 그 이후로 이제훈 씨의 국내, 해외 팬분들이 찾아와 주셨어요. 또 이제훈 씨와 절친한 홍사빈 씨도 방문하셨고요."

무명이 꿈꾸는 미래는 거창한 성공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소중한 파편으로 남는 일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영화와 배우를 미리 알아봐 준 이 공간이, 훗날 그들이 세상의 빛을 볼 때 관객들에게는 가장 특별한 첫 만남의 장소로 기억되길 꿈꾼다.

"나중에 관객분들이 강릉을 떠올릴 때 '거기 참 좋았지'라고 추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훗날 극장에서 유명한 배우를 보며 '나 저 사람 무명 극장에서 봤었는데'라고 말하는 순간이 온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무명이라는 작은 다락방이 6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온 힘은 결국 스스로를 믿고 지켜낸 마음에서 비롯됐다. 신원덕 대표는 자신과 같은 길을 꿈꾸는 이들에게, 공간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흔들리지 않는 중심임을 강조하며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일단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힘든 순간이 많아도 버텼으면 좋겠어요. 공간이 작아도 아름답게 꾸미고 우리만의 차별화를 두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거든요. 작은 공간의 힘을 믿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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