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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시각] ‘무료 챗GPT’ 취급받는 마을변호사
조선비즈
지난 29일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로비, 법무부가 내건 광고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검찰과 교도소를 관장하는 부처라는 법무부의 ‘차가운’ 이미지 너머, 법의 문턱을 낮추겠다는 복지 행정의 의지가 읽혔다.
마을변호사 제도는 애초 변호사 구경하기 힘든 섬마을이나 산골 주민들을 위한 ‘법률 안전망’이었다. 2013년 도입된 이 제도는 올해로 13년째다. 전국 1414개 읍·면·동에 1200여 명의 변호사가 이름을 올렸다.
스마트폰 검색이 서툰 고령층에게 임대차 계약, 채무 관계 같은 법률 문제는 생존의 영역이다. 변호사들은 본업의 틈을 쪼개고, 때로는 사비까지 들여 벽지(僻地)를 찾는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 이들의 활동은 ‘재능 기부’다.
문제는 제도의 취지와 달리 현장에서는 이 선의(善意)가 악용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최근 만난 마을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무료 챗GPT가 된 기분”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고가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시내 로펌(법무법인)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자산들이 ‘공짜’라는 이유로 마을변호사를 찾는다. 지방법원 인근에 살면서도 “상담비가 아깝다”며 수시로 전화를 걸어 법률 지식을 캐묻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귀한 공익 자원이 ‘무료 인공지능(AI) 서비스’처럼 취급되는 셈이다.
한 마을변호사는 “한창 일하고 있는데 지역 주민이라며 다짜고짜 전화가 와 상담을 요구할 때면 자괴감이 든다”며 “무료 상담에 시간을 빼앗겨 정작 수임한 사건에 집중하지 못할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선의를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는 이들 탓에, 정작 변호사의 도움이 절실한 취약 계층은 뒤로 밀린다.
행정의 무관심도 문제를 키운다. 어떤 면사무소는 상담 수요를 미리 파악해 변호사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주는 반면, 어떤 곳은 변호사 연락처만 툭 던져주고 “알아서 하라”며 손을 놓는다. 지자체들이 법무부 제도와 별도로 유사한 법률 지원 사업을 난립시키면서 변호사 인력이 분산·낭비되는 일도 벌어진다.
변호사법은 변호사에게 연간 일정 시간의 공익 활동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무가 복지 혜택이 불필요한 이들의 ‘공짜 상담’을 뒷받침하라는 뜻은 아니다. 숭고한 봉사가 소수의 ‘무임승차’를 위해 소모된다면, 그 제도는 지속될 수 없다.
정부는 이제라도 마을변호사 제도의 이용 기준과 운영 가이드라인을 재점검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공익인지, 어디까지가 공익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선의를 소모하는 시스템은 복지가 아니라 방치다. 마을변호사가 공짜 상담소나 무료 챗GPT가 아닌, 진정한 법률 안전망으로 남기 위한 보완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