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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화되는 '자주·동맹' 주도권 갈등…엇박자에 중재 못하는 대통령실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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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북미대화 기대 속 부처간 갈등 심화되나

외교부는 美와 정례협의, 통일부는 불참하기로

대통령실 조율 부재…페이스메이커 기조 어디에
조현 외교부 장관과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18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정부 외교·안보 라인에서 잠재돼 있던 이른바 '자주파 대 동맹파' 구도가 전면 충돌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내년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둘러싼 부처 간 갈등이 같은 날 엇갈린 일정과 메시지로 공개 분출했다. 한미 공조를 앞세운 외교부와 남북관계 개선의 속도를 강조하는 통일부가 사실상 각자 행보에 나섰지만, 이를 조율해야 할 대통령실은 뚜렷한 중재 메시지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외교부와 통일부는 이날 각각 미국 및 주한 외교단을 상대로 대북정책과 관련한 별도 일정을 소화했다. 표면적으로는 역할 분담 차원의 행보라는 설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북정책 주도권을 둘러싼 기싸움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외교부는 이날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미국과 대북정책 조율을 위한 정례 협의 첫 회의를 열었다. 회의 명칭은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 후속 협의'로 정해졌다. 과거 남북관계 개선의 '족쇄'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한미 워킹그룹의 부활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정상회담 후속 조치라는 성격을 전면에 내세운 명명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외교가 안팎에서는 형식만 달라졌을 뿐, 실질적으로는 한미 간 대북정책을 사전에 조율하는 상설 협의체가 재가동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적지 않다. 특히 미국이 여전히 제재 유지를 협상력의 핵심 수단으로 보는 상황에서 이 협의체가 남북관계 속도 조절 장치로 기능할 경우 '워킹그룹 시즌 2'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회의에는 정연두 외교전략정보본부장과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가 양국 수석대표로 참석했고 한국 측에서는 백용진 한반도정책국장, 미국 측에서는 댄 신트론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국 부차관보 대행과 마리아 샌드 동아태국 북한팀장 등이 배석했다. 국방부와 미 국방부 인원도 함께해 군사·안보 분야를 포함한 대북정책 전반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회의에서는 조인트 팩트시트에 기초해 팩트시트상 한반도 관련 한미 간 제반 현안이 포괄적으로 논의됐다"고 밝혔다. 팩트시트에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안정에 대한 의지 재확인 △2018년 싱가포르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협력 △대북정책 관련 긴밀한 공조 △북한의 대화 복귀 및 대량살상무기·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포기 촉구 등이 담겼다고 외교부는 설명했다.
정연두 외교전략정보본부장(오른쪽)과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가 1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공동설명자료) 후속 협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부가 '포괄적 논의'를 강조한 것은 대북 제재 유지 속에서 대화 재개를 모색하는 한미 공조 기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이는 이날 오전 통일부가 내놓은 발언과도 미묘하게 엇갈린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남북 대화나 교류 협력이 있을 때는 통일부가 보다 더 주도적으로, 적극적으로 하겠다"며 사안별 역할 분담론을 꺼냈다. 필요하다면 미국과도 직접 협의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외교부 주도의 한미 대북 협의에 선을 긋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실제로 통일부는 외교부가 주도한 이날 한미 정례 협의에 불참했다. 대신 이날 오후 주한 외교단과 국제기구 관계자를 대상으로 별도의 대북정책 설명회를 열고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 방향에 대한 지지를 당부했다. 통일부는 이 설명회가 외교부 일정과는 무관하게 사전에 계획된 연례 행사라고 설명했지만 외교부·미측과의 협의가 진행되는 날에 맞물려 열렸다는 점에서 해석은 분분하다.

외교가 안팎에서는 통일부의 이런 행보가 자칫 '외교부 패싱' 또는 '한미 공조 이탈'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이 여전히 대북 제재를 협상력의 핵심 수단으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제재와 무관하게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려는 신호로 읽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해온 '페이스메이커' 역할론과도 결이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미 간 대화 재개를 서두르되, 한국이 앞서가거나 따로 움직이기보다는 한미 공조 속에서 국면을 관리하겠다는 기존 메시지와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각 부처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갈등으로 볼 수는 없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북정책은 외교·안보·통일 전반이 맞물린 사안으로, 부처별 역할과 접근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며 "최종적인 방향은 대통령이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오전 미국 출국에 앞서 인천국제공항에서 취재진들과 만나 통일부가 외교부 주도의 '한미 외교당국 협의체'에 불참하는 등 대북 정책과 관련해 부처 간 갈등이 보여지는 것에 대해 "그런 우려는 듣고 있다"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많은 논의를 하고 조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조율) 이후에도 약간의 개별적 부처 의견이 나오는 것은 맞지만, 최근의 사안도 대부분 조율된 것들"이라며 "그런 과정은 계속 진행해 정부가 '원 보이스'로 대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한미 정상회담 후속 조치 방안 논의를 위해 16일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처 간 이견이 공개 일정과 발언을 통해 노출되고 있음에도 대통령실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혼선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특히 한미 간 정례 협의에 통일부가 불참하고 별도의 외교단 설명회를 연 상황에 대해서도 대통령실은 별도의 입장이나 조율 메시지를 내놓지 않았다.

외교가 안팎에서는 자주·동맹파 구도가 굳어질수록 대통령실의 조정 기능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당국자는 "외교부는 한미 공조를, 통일부는 남북관계 주도권을 각각 쥐려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며 "북미 대화 국면이 본격화되면 정책 노선 충돌은 더 잦아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갈등이 단순한 부처 간 알력 다툼을 넘어, 이재명 정부 대북정책의 정체성을 둘러싼 신호 싸움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제재 틀 안에서 대화를 관리하려는 동맹 중심 접근과 남북관계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려는 자주적 접근이 충돌하는 국면에서 대통령실이 명확한 원칙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정책 혼선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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