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읽음
가을 유서- 류시화
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 꺼풀 위에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싸늘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새 하얗게 들어나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은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벌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큰 곰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