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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S RSC①] 과학, 미지의 세계서 길을 밝히다
시사위크
과학은 우리가 볼 수 없던 세계를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눈에 닿지 않던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고, 그 안에서 작동하던 질서와 움직임을 보여주며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가 예술이 되고, 세포와 분자의 움직임 또 다른 언어가 되는 순간 과학은 이미 일상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이런 발견에는 분명한 조건이 필요하다. 정밀한 장비를 갖춰야 하고 이를 운용할 전문 인력이 있어야 하며, 긴 연구를 버틸 수 있는 환경도 마련돼야 한다. 기초과학은 결국 거대 장비와 과학자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성과를 만든다. 이 기반이 단단해질수록 과학이 보여주는 세계도 더 깊고 넓어진다.
◇ 과학의 시선이 예술로 이어지는 순간
대전 대덕구 한가운데 자리한 기초과학연구원(IBS)의 리서치솔루션센터(RSC) 실험실에서는 과학자들이 매일 새로운 ‘이미지’를 마주한다. 현미경 속에서 포착한 작은 패턴과 형상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드러내는 가장 첫 모습에 가깝다. 세포가 그리는 곡선, 단백질 표면이 남기는 질감, 시뮬레이션이 만들어내는 흐름의 형태들은 연구자에게 분석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한 장의 ‘예술적 장면’으로 읽히기도 한다. 과학이 예술로 확장되는 순간은 늘 이렇게, 연구 현장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시작된다.

두 기관이 촬영한 미시 세계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연구 환경과 기술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모두 ‘자연이 스스로의 구조를 어떻게 드러내는가’라는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Cryo-EM(초저온투과전자현미경)으로 냉각된 단백질을 촬영한 이미지부터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우주의 흐름까지, 다양한 장면이 과학적 자료를 넘어 예술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그 순간 관람객은 과학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길, 즉 시각적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이 가능한 이유는 RSC가 미시 세계를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관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RSC는 이미징·해석·시뮬레이션이 동시에 이뤄지는 국내 유일의 집적형 연구 플랫폼에 가깝다. 연구자들은 실험에서 얻은 데이터를 들고 이곳을 찾는다. 그 데이터는 RSC에서 수백만 장의 이미지로 저장되고 분석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이 싹튼다.

RSC의 역할은 장비를 제공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연구자가 어떤 대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본다’는 과정이 필요하다. RSC의 이미징 장비가 미시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열어준다면 슈퍼컴퓨터는 그 뒤에 숨은 구조와 규칙을 해석하는 지적 근력을 제공한다. 즉 RSC는 과학의 눈과 두뇌가 동시에 작동하는 ‘관찰–해석 허브’에 가깝다. 연구자가 마주한 이미지가 예술적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각이 다시 새로운 과학적 질문을 만들어내는 순환도 이곳에서 가능해진다.
이렇게 RSC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단순한 기술 지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과학이 예술을 자극하고, 예술적 시선이 다시 과학의 질문을 확장시키는 과정은 기초과학이 가진 넓은 확장성을 보여준다. 그 배경에는 대규모 장비뿐 아니라 이를 다루는 기술진, 그리고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 생태계가 함께 작동하는 구조가 있다. 연구자들은 이 유기적 구조를 “과학이 스스로 성장하는 생태계”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RSC는 그 생태계가 실제로 작동하는 현장이다.

IBS RSC의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 “기초과학 연구는 결국 시간과 인프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단백질 구조를 분석하는 Cryo-EM 연구만 해도, 한 번의 촬영을 위해 필요한 시료 준비부터 데이터 수집, 분석까지 몇 달에서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다. 세계적으로 연구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점에서 연구 자원을 얼마나 넉넉하게 확보하느냐가 곧 연구 속도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RSC 류범한 선임기술원은 “같은 주제의 연구를 국내외에서 동시에 진행하다 보면 결국 인프라의 차이가 데이터 생산 속도를 갈라놓는다”고 설명했다.
인프라의 핵심은 장비와 사람이다. Cryo-EM 장비는 한 대당 100억원 안팎의 고가 장비로 알려져 있다. 도입 이후에도 정밀한 유지·운용이 필수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전문 인력 없이는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류 선임기술원은 “장비를 몇 대 더 들여오는 것보다,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기술 인력을 5~10명 더 확보하는 편이 훨씬 더 큰 연구 효과를 낸다”고 강조했다.

허무영 책임기술원은 이 문제를 연구의 구조적 한계로 설명한다. 연구자의 역할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지만 그 기반에는 장비를 운영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술 인력의 노동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대학 연구실은 여전히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이 연구지원 역할을 겸하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허 책임기술원은 “해외 연구기관은 실험 재료 준비부터 장비 관리까지 전담 기술 인력이 맡는다. 연구자는 연구에만 집중한다”며 “한국의 기초과학이 도약하려면 연구지원 체계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인프라의 부족은 단순히 ‘지원이 적다’는 차원을 넘어 연구의 속도와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Cryo-EM 연구가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중국·일본 등은 수십 대의 장비와 대규모 분석 인력을 확보하며 연구 생태계를 키웠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기초과학의 전망이 어둡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연구자들은 “지금이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고가 장비의 확충과 함께 장비 전문인력에 대한 적절한 처우, 안정적 일자리, 체계적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된다면 한국의 기초과학은 수많은 가능성을 현실로 바꿀 수 있다. 류 선임기술원은 “장비 예산만큼 사람에 대한 투자도 필요하다. 그래야 장비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허 책임기술원 역시 “RSC는 연구의 조연이지만, 좋은 조연 없이는 좋은 주연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초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학문이고, 그 과정에는 많은 보이지 않는 기반이 필요하다. 과학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그 기반을 얼마나 섬세하게 갖추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