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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S RSC②] 과학, 아는 만큼 보이는 ‘작지만 넓은 세계’
시사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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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은 가장 작은 곳에서 가장 큰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다. 우리가 볼 수 없던 세계를 드러내고,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구조를 읽어내며, 때로는 예술적 감각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발견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밀한 장비와 이를 운용하는 기술진,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 환경, 그리고 실험동물을 둘러싼 윤리적 고민까지 기초과학의 성과 뒤에는 늘 보이지 않는 기반과 사람이 있다. 그 기반을 들여다보는 일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편집자주]
저 바닥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

(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

-리처드 파인만 (1959)

시사위크|대전=박설민·김두완 기자

1959년 12월 29일, 미국의 위대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미국 물리학회 강의에서 한 말이다. 이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가시적 세계를 넘어 ‘미시(微視) 세계’로 넘어간다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밝혀낼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나노미터(nm) 단위의 미시세계는 넓다. 이는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다. 날카로운 바늘 끝에도 ‘작은 우주’가 숨어 있다. 박테리아, 바이러스부터 원자와 전자에 이르기까지, 작지만 광활한 미시세계의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작은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선 훌륭한 선장과 배, 선원이 필요하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리서치솔루션센터(RSC)에서는 ‘이미징 분석’과 ‘초고성능 컴퓨팅자원’ 시설이 이 역할을 맡는다. 한국 기초과학연구의 ‘성지’로 불리는 IBS RSC를 찾아 ‘가장 작은 곳에서 가장 넓은 세계’를 탐험하는 과학자들을 만났다.
◇ 생명의 근원 ‘단백질’의 비밀을 밝히는 ‘전자 눈’

“우우우우웅”

어두운 실험실 안, 거대한 직육면체 모양의 장치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하얀색 몸통에 푸른색 빛을 발하는 장치에서는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거대한 냉장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이 장치에 연결된 컴퓨터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지난 11월 27일 취재팀이 방문한 이곳은 ‘IBS RSC’의 ‘이미징분석자원시설’이다. 구조생물학 연구에 필요한 생물시료를 관찰 또는 분석하는 곳이다. 세포 수준에서 생체 분자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정밀한 이미지 및 특성 분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 크기는 수 나노미터(nm)에 이르는 수준으로 매우 작다.
실험실의 거대한 냉장고처럼 보이는 장비의 이름은 ‘초저온바이오투과전자현미경(Cryo-EM)’이다. 이미징분석자원시설의 ‘심장’이다. 단백질 등 생체분자의 3차원 구조를 원자 수준에서 고분해능으로 규명한다. 이 데이터를 활용, 연구자들은 각각의 생체분자의 상확용과 구조적 변화를 연구한다.

잠시 후, IBS의 연구원들이 원통형의 캡슐처럼 보이는 물건을 들고 왔다. Cryo-EM으로 살펴볼 단백질 분자 시료였다. Cryo-EM에 사용하기 위해선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를 사용, 극저온으로 시료를 얼린다. 생체분자를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고정시키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면 시료의 변질을 막고 다각면으로 관찰할 수 있다.
연구원들은 냉장고처럼 보이는 Cryo-EM의 문을 스패너로 열었다. 내부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장치들과 전선으로 이뤄져 있었다. 캡슐 형태의 시료 샘플을 Cryo-EM 내부에 넣고 촬영을 시작하자 밖의 컴퓨터 화면엔 회색빛 사진이 나타났다. 전자현미경으로 단백질 분자를 구현한 것이다.

물론 ‘도깨비방망이’처럼 시료를 넣는다고 해서 실험 결과가 뚝딱 나오는 것은 아니다. Cryo-EM은 초정밀 전자망원경이지만 단백질 분자의 크기는 매우 작다. 때문에 완벽한 데이터를 얻어내기 위해선 수백, 수천 장의 사진을 찍고, 이를 시뮬레이션해 최적의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
Cryo-EM을 활용한 대표 연구 성과로는 2023년 IBS RNA 연구단의 사례가 있다. 당시 연구단은 인체 내에서 RNA를 절단하는 단백질 ‘다이서(DICER)’와 마이크로RNA 전구체 간 복합체 구조 변화를 규명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IBS 기억 및 교세포 연구단과 IBS 바이오분자 및 세포 구조 연구단이 Cryo-EM을 활용, 세포 골지체의 pH를 조절하는 단백질 구조를 규명했다. 이를 활용하면 인지장애 등 뇌질환의 새로운 표적 치료 개발이 가능해진다.

류범한 IBS RSC 선임기술원은 “Cryo-EM을 활용한 연구는 생명공학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지만 원하는 데이터를 얻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Cryo-EM 촬영 및 세팅 작업에만 길게는 몇 달, 1년 가까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 IBS 리서치솔루션센터의 ‘두뇌’, 슈퍼컴퓨터

Cryo-EM 장비를 살펴본 뒤 이동한 곳은 IBS RSC의 ‘두뇌’가 자리 잡은 슈퍼컴퓨터 운영동이었다. 이곳에는 ‘알레프(ALEPH)’와 ‘올라프(Olaf)’라는 이름이 붙은 2대의 슈퍼컴퓨터가 운영되고 있다.

운영동 내부의 공식적인 사진 촬영은 금지됐다. 전선의 연결, 구성 등이 외부에 유출될 경우 IP노출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때문에 철저한 보안 유지가 필요했다. 슈퍼컴퓨터들의 겉부분을 그림이 그려진 케이스로 덮어두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슈퍼컴퓨터 운영동으로 들어가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슈퍼컴퓨터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냉각시스템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IBS의 알레프와 올라프는 ‘수냉식(水冷式)’ 냉각시스템을 사용했다. 쉽게 말해 냉각 액체를 활용해 컴퓨터를 식히는 것이다. 공기를 이용한 공랭식 냉각보다 효율이 좋고 소음이 적은 것이 장점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커다란 유리관 내부에 들어있는 IBS의 ‘올라프’였다. 올라프라는 이름은 영화 ‘겨울왕국’의 눈사람 캐릭터 올라프에서 따온 것이다. Cryo-EM과의 연동한 데이터 연산이 주 업무인 슈퍼컴퓨터의 특징에서 착안, ‘얼음’과 연관되면서 형인 알레프와 이름이 비슷한 올라프로 명명된 것이라고 한다.

신형 슈퍼컴퓨터인만큼 성능도 향상됐다. IBS에 따르면 올라프의 연산성능은 1호기인 알레프보다 3.3배 빠르고 저장용량은 1.6배 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핵심 임무는 Cryo-EM 연구의 지원이다. 단백질 분자 구조 분석의 경우 Cryo-EM으로 한 번 촬영 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발생한다. 이를 실시간으로 빠르게 분석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올라프다.

또한 Cryo-EM뿐만 아니라 차세대염기서열분석기(NGS), 자기공명영상장치(MRI) 등에서 생산되는 대규모 연구데이터를 분석에 사용한다. 우주과학의 핵심 연구 분야인 ‘암흑물질’ 연구를 위해 IBS지하실험연구단이 운영하는 ‘예미랩’의 데이터 분석도 올라프가 맡아 진행한다.

허무영 책임기술원은 “이미징분석자원의 Cryo-EM의 경우 한 번의 실험으로 10TB 이상의 데이터를 수집하는데, 이를 처리분석하기 위해선 슈퍼컴퓨터 자원이 뒷받침된다”며 “이 슈퍼컴퓨터들은 IBS 실험장비 이외에도 한국천문연구원의 KVN과 같이 한 번의 관측으로 수백TB 이상의 데이터가 수집되는 관측 장비의 데이터 분석에도 활용된다”고 말했다.
◇ 기후변화의 비밀도 ‘슈퍼컴’이 밝힌다

최신형 슈퍼컴퓨터인 동생 올라프보단 성능이 약간 부족하지만 알레프도 IBS의 핵심 연구자원이다. 알레프는 히브리어의 첫 글자로, 알파벳에선 ‘A’다. 수학에서는 ‘무한(∞)’을 의미한다. IBS의 첫 번째 슈퍼컴퓨터인 알레프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과학연구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알레프가 처음 가동된 것은 2019년 4월이다.

알레프의 연산속도는 1.4377페타플롭스(PF)다. 이는 1초에 약 1,000조번 이상의 연산이 가능한 수준이다. 데이터 저장 용량은 약 8,740테라바이트(TB)다. 이는 구축 당시 기준 국내 공공기관이 보유한 슈퍼컴퓨터 중에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와 기상청에 이어 세 번째 성능 수준이다.
알레프의 핵심 연구 분야는 ‘기후변화’다. 2019년 가동 이후, IBS 기후물리연구단을 중심으로 전지구 시스템 모형인 ‘복합지구시스템모델(Community Earth System Model, CESM)’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는 지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 기후변화를 예측하는 연구다.

대표적인 연구는 지난 11월 발표한 성과다. 악셀 팀머단 단장 연구팀은 알레프를 활용, 지구온난화로 극지 얼음이 녹으면 바다의 ‘중규모 수평 교란 현상’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측했다. 중규모 수평 교란은 바람, 해류, 소용돌이가 만들어내는 물결 섞임이다. 말 그대로 바다 전체의 해류가 뒤틀려 생태계에 엄청난 교란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허 책임기술원은 “초고성능컴퓨팅 자원은 크게 수치모델링/시뮬레이션과 대용량 데이터 분석을 수행하는 장비”라며 “기후물리연구단에서 전지구 시뮬레이션을 통해 미래 기후변화로 인한 산불, 가뭄, 태풍과 같은 극한 현상 발생 원인을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진화하는 IBS의 슈퍼컴퓨터, 2027년 3호기 준비한다

아울러 IBS RSC의 슈퍼컴퓨팅 자원은 더욱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정부가 엔비디아(NVIDIA)로부터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 공급을 약속받으면서다. IBS에서도 이 자원이 센터에 공급될 경우, 슈퍼컴퓨터 성능 극대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올라프의 경우엔 엔비디아 GPU 모델인 ‘V100’와 ‘H100’을 각각 40장, 48장이 탑재돼 있다.

IBS는 이 같은 자원을 기반, ‘슈퍼컴퓨터 3호기’ 구축도 추진 중이다. 박수동 IBS RSC 인프라운영팀 팀장에 따르면 IBS는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해 2027년 IBS 슈퍼컴퓨터 3호기 구축을 준비하고 있다. 해당 컴퓨터는 CPU 4PF와 GPU 4PF급 하이브리드 형태로 기획 중이다.

향후 도입될 슈퍼컴퓨터 3호기에는 500장 정도의 최신 GPU가 필요하다는 것이 IBS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IBS의 슈퍼컴퓨터에서 현재 진행되는 기후변화, 미세분자 연구와 함께 우주과학 분야까지 범위를 넓히게 되면 필요 GPU자원량이 급격히 증가한다. 실제로 IBS RSC는 2022년부터 과기정통부로부터 우주분야 초고성능컴퓨팅전문센터로 지정되기도 했다.
허 책임기술원은 “고성능 GPU들은 최첨단 AI기술을 활용, 다양한 기초과학 분야 연구에 사용된다”며 “물질의 양자역학적 구조 계산을 위한 에너지함수 추출 연구에서부터 CryoEM으로 수집한 단백질 구조 계산 및 디자인 대규모 위성영상 데이터 분석, 전파망원경의 블랙홀 관측 등 우주과학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매우 넓다”고 말했다.

이어 “2022년 IBS는 초고성능컴퓨팅 관련하여 과기정통부로부터 우주분야 초고성능컴퓨팅전문센터로 지정됐다”며 “국내 우주 분야 초고성능컴퓨팅 수요를 고려할 때, 향후 500장 정도의 GPU가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팀장은 “향후 슈퍼컴퓨터 3호기가 도입된다면 우주진화, 전지구 기후변화 시뮬레이션 등 CPU 자원이 집중 투입되는 연구계산과 AI활용 단백질 구조 예측, 물질의 전자구조 계산 등 다분야 활용이 가능할 것”이라며 “IBS는 과학연구용 AI모델 개발 등 GPU 자원이 투입되는 연구계산에 두루 활용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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