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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S RSC④] 동정 피로감, 과학이 견뎌야 할 무게
시사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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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은 가장 작은 곳에서 가장 큰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다. 우리가 볼 수 없던 세계를 드러내고,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구조를 읽어내며, 때로는 예술적 감각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발견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밀한 장비와 이를 운용하는 기술진,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 환경, 그리고 실험동물을 둘러싼 윤리적 고민까지 기초과학의 성과 뒤에는 늘 보이지 않는 기반과 사람이 있다. 그 기반을 들여다보는 일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편집자주]
시사위크|대전=김두완·박설민 기자

과학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한다. 생명과학 연구에서 새로운 지식을 향한 탐구와 실험동물의 생명이라는 두 가치가 종종 충돌할 때, 연구자는 그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동물실험은 기초과학의 중요한 기반이지만 동시에 연구자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딜레마다.

실험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실험의 필요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규정과 절차는 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연구자들은 이런 기준안에서 매일 선택을 반복하며 과학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 왔다. 동물실험을 둘러싼 이 조용한 고민 역시 연구의 일부이며, 과학자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현실이다.

◇ 과학과 윤리의 경계에 선 연구자들

대전 기초과학연구원(IBS) 리서치솔루션센터(RSC)의 동물자원시설은 이런 고민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다. 이곳에서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실험동물의 생명 그 자체다. 케이지 안에서 실험용 쥐가 △움직이는 방식 △먹이를 집어삼키는 속도 △스트레스 반응의 미세한 변화까지 연구자의 눈은 늘 생명을 향해 있다.
실험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면서도 연구자들은 그 생명이 가진 감각과 체온, 반응을 외면할 수 없다. 수의사인 김환 책임기술원은 “동물을 다루는 순간마다 감정이 생긴다.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연구자가 기계적 판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험 과정에서 다루는 동물이 살아 있는 존재임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물실험을 수행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컴패션 피로(compassion fatigue)’라는 개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락사 절차를 반복하며 생명을 떠나보내는 경험은 연구자에게 심리적 부담을 남기며,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엔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시 부담이 밀려오는 반복 속에서 연구자는 자신의 선택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동물실험은 피할 수 없는 분야임을 잘 알면서도 그 과정에서 오는 ‘동정 피로감’을 외면할 수 없다. 기초과학의 성과 뒤에는 실험동물의 희생이 존재하며, 그 사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사람이 바로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자의 감정만으로 윤리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동물실험의 적정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기준과 수치화된 지표가 필요하다. IBS RSC는 국제 가이드라인에 따라 고통을 정량화하는 여러 지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체중 변화 △움직임 감소 △피부 상태 △호흡 패턴과 같은 항목은 점수로 기록하고 일정 기준을 넘어서면 실험은 즉시 중단된다. 말을 하지 못하는 동물의 상태를 ‘보이는 정보’로 전환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때문에 연구자는 감정이 아닌 데이터에 근거해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판단은 연구자 개인에게만 맡겨지지 않는다. 동물실험윤리위원회(IACUC)의 심의 과정에서 연구자가 설계한 모든 실험 절차가 다시 검증된다. 실험에 필요한 △개체 수 △실험 방법 △예상되는 고통의 수준 △고통을 줄이기 위한 대체 방안 △실험 종료 기준까지 모든 단계가 사전에 설명돼야 한다. 단순히 “필요하다”는 주장만으로는 허용되지 않는다. 연구자 스스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이 왜 불가피한지, 그리고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어떤 조치를 마련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IACUC는 동물복지 전문가, 수의사, 과학자, 그리고 일반 시민 대표까지 포함해 다양한 시각으로 실험의 필요성과 적절성을 검토한다. 이는 연구실 안에서 내려진 판단이 사회적 기준과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김환 책임기술원은 “중학생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 정도로 명확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의미다. 동물실험은 과학자의 손끝에서 시작되지만, 그 정당성은 사회 전체가 함께 검증하고 책임지는 구조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 ‘잉여동물’이란 또 다른 딜레마

동물실험의 윤리는 실험 과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과 실험이 끝난 뒤에도 새로운 고민이 이어진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잉여동물’ 문제다. 이는 실험을 위해 번식된 동물 가운데 실제 연구에 사용되지 못한 개체들을 말한다.

유전자형이 연구 목적과 맞지 않거나, 수가 초과되거나, 실험 일정이 변경될 때마다 잉여 개체가 생긴다. 실험에 투입되지 않았더라도 그 생명은 연구실 안에서 끝나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또 하나의 과제로 받아들인다.

IBS 연구진도 이 문제를 가볍게 보지 않는다. 잉여 개체는 단순한 “남는 쥐”가 아니라 시설 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개체 수가 일정 기준을 넘어서면 케이지 밀도가 올라가고 이는 스트레스와 감염 위험으로 이어진다. 감염이 발생하면 연구가 중단될 뿐 아니라 개체 전체를 폐기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찬미 IBS RSC 선임기술원은 SPF(Specific Pathogen Free) 시설에서 개체 관리가 얼마나 민감한지 설명했다. 그는 “SPF 시설은 병원체 유입이 치명적이다. 오염이 발견되면 개체 전량을 폐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잉여동물’ 문제가 단순한 자원 관리가 아니라 생명과 연구의 연속성을 동시에 좌우하는 핵심 과제임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IBS RSC는 잉여동물을 최소화하기 위해 △번식 속도 조절 △유전자형 검사 △실험 일정 기반의 개체 수 예측 등 다양한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변수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실험 조건이 바뀌면 개체의 역할이 사라지기도 하고, 질병이나 스트레스 반응으로 사용할 수 없는 개체가 생기기도 한다. 연구자는 그때마다 실험의 시작과 종료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

잉여 개체 처리 과정이 연구자에게 주는 심리적 부담도 작지 않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잉여동물을 줄이기 위한 시스템을 갖추는 일은 시설 운영뿐 아니라 연구자의 정서적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잉여동물’ 문제는 사회적 요구와도 맞닿아 있다. 동물복지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연구 윤리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서 연구기관은 더 투명한 절차와 설득력 있는 판단 근거를 갖춰야 한다. IACUC 심의에서도 잉여동물 발생 가능성과 이를 줄이기 위한 대체 방안, 종료 기준이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제도적 보완은 여전히 필요하다. 윤리적 검증 절차는 강화되고 있지만 실험을 수행하는 전문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적절한 처우를 보장하는 논의는 부족하다. 연구자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기 위한 상담 시스템, 교육 프로그램, 장기적 연구지원 체계 역시 충분하지 않다.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동물실험을 둘러싼 규범과 지원도 그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물실험을 둘러싼 고민은 실험대 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번식 계획을 세우는 순간부터 실험이 끝난 뒤 정리까지 연구자는 매 단계마다 생명과 연구 목적 사이에서 균형을 조정해야 한다. 이 과정은 개인의 윤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연구자의 선택을 지탱하는 제도, 사회적 책임, 적절한 지원 체계가 함께 작동해야 비로소 균형을 찾을 수 있다.

IBS RSC의 연구자들이 매일 반복하는 선택과 고민은 과학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고민이 쌓여 과학의 윤리가 만들어지고 그 윤리가 다시 연구의 방향을 결정한다. 동물실험을 둘러싼 고민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 무게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에서 과학의 다음 걸음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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