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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상태
백지상태
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나보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나보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
아무 데로나 가도 상관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나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거기서 뒤돌아본 강 위론 아직 눈이 내리는 듯하고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에서(12~13)
- 창비시선 493, 2023.11.10
:
이미 중3 때,
애들 부탁으로 담배를 사러 다녀도 되던
일찌감치 노안인 내가
여태 백발이 되지 않는
세상의 공평함(!)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거울을 보네
1985년 대학 입학 때
모습 그대로라는 내 얼굴을,
가끔 눈부시구나
이제서야 반짝이는
몇 가닥 흰 머리카락
( 251211 들풀처럼 )
#오늘의_시
- 사진 : 171111 몽골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