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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대신 '소송'하라고? 노동부가 왜 대화를 막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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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쉽게 죽는 조선소, 지난해에만 19명의 하청노동자가 배를 만들다 사망했다. 그런 위험한 일자리에서 일하지만, 임금이 30%나 삭감됐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 취업 불이익으로 이어진다. 하청 업체 소속이라고 차별받는다. 그래도 조선소에서 일해야 하는 하청노동자들은 이대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2022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하청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고공농성에 올랐고, 0.3평에 불과한 작은 철장을 용접해 자신을 가뒀다. 하청업체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진짜 사장' 대우조선해양이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대화조차 하지 않았고, 하청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내던지는 ‘단체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 투쟁은 470억이 넘는 손해배상으로 청구됐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2025년 김형수 지회장의 97일 간의 고공농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목소리는 법이 되었고, 대통령의 거부권 끝에 2025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 개정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개정된 노조법 2조는 진짜 사장 원청의 책임을 분명하게 하기에 ‘진짜 사장 책임법’이라 불렸고, 노조법 3조 개정은 노조활동에 대한 손해배상을 물리는 것을 막고자 노란봉투에 십시일반 모금운동을 한 시민들의 마음을 담아 '노란봉투법'이라고 불렸다.
이제 원청교섭 가능한 걸까?

이대로 살 수 없었던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이제 원청 한화오션과 교섭할 수 있을까?

자본은 엄살이 심하다. 노동자들은 위험한 일자리에서 임금까지 빼앗기며 일한다. 그런데 대화하자, 교섭하자 말하면 앓는 소리를 낸다. 2011년 국회는 꾀병에 주사를 놔줬다. 교섭할 노조를 하나로 정해서 오라는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를 만든 것이다.

아프지도 않은데 독한 약을 놓으니 한국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이 터져 나왔다. 창구단일화 강제 제도는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사업이나 사업장 단위로만 허용한다. 같은 지역, 같은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영향을 주고 받는 사안이라도 노동조합을 기업 속에 고립시킨다. 사용자들은 어용노조를 만들며 민주노조 활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썼다.

이재명 정부가 만든 개정노조법 시행령에도 창구단일화가 있다. 경우에 따라 복수노조법 창구단일화를 넘어서는 극약처방이 될 수 있다. 노조법 2조를 개정해 원청 교섭을 보장했지만, 시행령은 사실상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려고 만든 개정노조법의 시행령인데 말이다. 복수노조일 경우 한 노조만 상대하면 된다는 규정을 원하청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는 노동조건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노동부는 원청노조와 하청노조를 따로 교섭하도록 매뉴얼에 두고 있다. 이를 두고 '원하청교섭단위 분리'라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매뉴얼'은 법도 시행령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측 입장에서는 창구단일화로 원청노조든 하청노조든 복수노조든 한 개의 노조와 교섭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노조법 개정을 이끌어 낸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조차 교섭이 어려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원청노조가 교섭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데,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대화 대신 소송하라고?

시행령이 통과되면 진짜 사장을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심사하게 된다. 노동자가 누구에게 일하는지 노동부가 대신 정하겠다는 것이다.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가 누군지 '노동자도, 원청도 아닌 제3자가' 판단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와도 지리멸렬한 소송전으로 번지게 될 것이다. 사측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항소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진짜 사장과 대화하기 위해 항소할 것이다. 1심, 2심, 3심 이어지면 대화 테이블에 앉는 것조차 몇 년이 걸리게 된다. 테이블에 앉아서 해결되기까지 또 수년이 걸린다. 하나의 사안으로 5년, 10년 넘기는 일이 우스워질지 모른다.

이대로 권리를 빼앗길 수 없는 노동자들은 단체 행동에 돌입할 것이다. 단체 행동권은 단체교섭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사용자를 압박할 수 있는 헌법상 권리를 뜻한다. 수년간 소송이 이어지면 거리에서 고통받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때로는 밥을 굶거나, 철창에 들어가거나, 고공에 오르는 가혹한 투쟁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법이 바뀌었음에도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인권

노동자들이 가혹한 투쟁에 몸을 던지는 것은 그보다 현실이 더 가혹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기본권이라는 노동3권도 이 가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권리다. 하청은 권한 없다고 말하고 원청은 의무 없다며 회피한다. 이도 저도 못하고 이대로도 살 수 없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목소리 내야할까?

지금 노동자들이 존엄하지 못하더라도, 존엄할 자격까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터의 구성원으로서 원청교섭은 상위법이 보장한 권리다. 시행령이 그 권리를 막아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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