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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프리미엄’ 처방, 기업엔 극약이다 [줌인IT]
IT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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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이 자사주를 1년 안에 의무 소각하도록 하는 3차 상법 개정을 연내 처리하겠다고 나섰다. 새로 사들인 자사주는 1년 내, 기존에 들고 있는 자사주는 1년 6개월 내 없애고 이를 어기면 이사 개인에게 5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리는 내용이 담겼다.

정치권에선 이를 ‘코리아 프리미엄’을 위한 제도 개선으로 설명한다. 시장에서 불투명하게 활용돼 온 ‘자사주 마법’을 차단하고 유통 주식 수를 줄여 주가와 주주가치를 끌어올리겠다는 취지다.

자사주 마법이란 회사가 들고 있는 자사주를 특정 상황에서 ‘지배력 강화 도구’처럼 쓰는 방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인적분할 과정에서 자사주에도 신주를 나눠주면 총수 일가가 들고 있는 지배 지분율이 실질적으로 커지는 효과가 생긴다. 즉 돈을 들이지 않고도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구조다. 정치권은 이 같은 활용을 원천 차단하겠다며 자사주를 ‘회사가 마음대로 쓰는 자산’이 아니라 ‘주주총회 승인을 거쳐야 하는 자본’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 고환율·고관세로 숨 고르기도 벅찬 재계는 난감하다. 자사주 소각 의무가 더해지면 기존 자본 운용 전략을 다시 짜야한다. 사실상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사라질 수 있다. 해외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의 앞선 사례는 이런 우려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성전자는 10월 ‘성과연동 주식보상(PSU)’ 제도 시행이 자사주 소각 회피용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이에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부터 올 9월까지 총 10조원 규모 자사주를 매입했고 이 중 8조4000억원어치는 소각 목적이라고 명확히 밝혀왔다. 남은 물량도 적절한 시점에 소각할 계획이다. 그럼에도 이런 오해가 나온 것은 법 개정이 가져올 자사주 활용 제한이 기업에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시장 역시 ‘불확실성’을 체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더불어민주당 코스피5000 특위는 경제단체를 만나 대안 장치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의무공개매수제가 거론된다. 인수자가 일정 비율 이상을 확보하려면 ‘50%+1주’까지 공개매수를 하도록 강제하는 방식이다. 적대적 M&A 위험을 줄이겠다는 취지지만 자칫 M&A 시장을 얼어붙게 해 기업 생태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 차등의결권 등 다른 방어 조치 도입 역시 재계가 강하게 요구하는 사안이다.

‘주주환원’과 ‘경영안정’ 중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이분법이 아니다. 두 축을 얼마나 균형 있게 다루느냐다. 지배력 강화에 자사주가 동원된 사례와 별개로 자사주는 갑작스런 시장 변동성 앞에서 기업이 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안전판이다. 단일 잣대로 모든 기업의 자사주 운용을 자르기엔 산업별·기업별 상황이 다르다.

자사주를 소각하며 투자와 배당 전략을 조정하는 회사도 있고 상대적으로 유동성·사업 구조가 취약해 자사주를 유연하게 보유해야 하는 기업도 있다. 법률로 자사주를 일괄 규정하기보다 기업의 책임 있는 선택을 유도하고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방식이 더 현실적이다.

코리아 프리미엄은 규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 경쟁력, 투자 여력, 경영 안정성, 투명한 시장 규율이 함께 갖춰질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전이 아니다. 기업이 책임 있게 자사주 정책을 설계하고, 시장이 감시하며, 제도로 투명성을 높이는 방식의 균형 잡힌 처방이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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