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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의료 경쟁력, 의사 과학자에게 달렸다 [줌인IT]
IT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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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과학의 경계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의사 과학자(physician-scientist)’다. 이들은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질병의 원인과 치료 원리를 실험실에서 규명하는 연구자다.

암, 희귀질환, 감염병, 뇌질환처럼 미지의 영역에 속한 질환들의 실마리는 대부분 이들의 손끝에서 풀린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존재는 여전히 희미하고, 그 중요성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부족한 실정이다.

의사 과학자는 단순히 의학지식을 실험실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환자 곁에서 관찰한 임상적 현상을 과학의 언어로 해석하고, 다시 연구 결과를 환자 치료로 되돌리는 ‘브릿지’ 역할을 한다.

미국 하버드나 스탠퍼드대병원, NIH(미국 국립보건원)에서는 이들이 신약 개발과 중개연구(translational research)의 주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약 후보물질의 발굴에서부터 임상 적용, 진료 가이드라인 수립까지 모든 혁신의 실마리에 의사 과학자가 있다.

한국에서도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이 2019년부터 본격 추진되고 있다. 서울대 의대에서만 2018년 이후 148명이 해당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이 중 48명이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졸업생의 절반가량(47.9%)이 연구소가 아닌 병원에 남았고, 순수 연구직으로 진출한 비율은 절반에도 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지원 사업 전체로 봐도 비슷하다. 77명의 수료생 중 순수 연구에 종사하는 인원은 34명(44.2%)에 불과하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돈과 구조’ 때문이다. 진료에 전념하는 임상의사는 비교적 안정적인 소득과 경력 보장을 받지만, 연구자는 수입이 적고 경력단절 위험이 크다.

대학병원 내 연구 인프라도 부족하다. 진료 중심의 문화 속에서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고, 연구비 지원은 대부분 기초과학 중심으로 편중돼 있다. 결국 많은 젊은 의사들이 ‘연구보다 병원’을 택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의사 과학자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의사는 곧 진료를, 과학자는 실험을 상징하는 좁은 시각이 여전히 강하다. 의사 과학자는 그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을 제시하지만 이들의 도전은 사회적 공감대 없이 개인의 희생으로만 남는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의사 과학자 양성에 대한 체계적 논의가 부족하다. 병원은 진료 실적 중심으로 평가되고, 연구 시간은 ‘비생산적인 공백’으로 취급된다. 국가 차원의 장기 펀딩이나 연구 전담 트랙 제도는 걸음마 수준이다.

의사 과학자는 단순한 직업군이 아니라 ‘지식 생태계의 연결자’다. 기초과학이 임상으로, 환자의 고통이 연구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연구자에게 충분한 시간도, 안정성도, 사회적 인정도 주지 않는다. 그 결과 기초의학은 점점 더 빈약해지고, 신약 개발과 의학 혁신의 속도는 더뎌진다.

기초 과학의 성장과 미래 의료 경쟁력은 ‘의사 과학자’에 달려 있다. 그들을 양성할 시스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공감대다. 연구를 통해 환자를 살리는 길이 곧 우리 모두의 건강한 미래로 이어진다는 사실 이 단순한 진리를, 이제는 사회 전체가 이해해야 할 때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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