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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병자’ 귀환… 新영국병에 英 재정도 ‘빨간불’
조선비즈1970년대 낮은 생산성과 과도한 복지로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영국병(British Disease)’이 21세기형으로 바뀌어 다시 영국을 덮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십 년간 누적된 복지 지출과 구조적인 저성장이 영국 경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영국 금융시장이 보내는 위험 신호는 명확하다. 지난 2일 영국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5.72%를 기록했다. 1998년 후 가장 높은 수치다. 18일(현지시각) 종가 역시 5.43%로 여전히 높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같은 날 미국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4.65%, 이탈리아는 4.41%을 기록했다. 일본 30년 국채 금리는 3.21%다. 국채 금리는 국가 신용도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금리가 오른다는 건 국채 가치 하락을 의미한다. 정부가 더 높은 이자를 줘야만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뜻이다. 영국 정부 재정 상태에 대한 시장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1970년대 영국은 낮은 자본 투자율과 노동 생산성 탓에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낮은 투자·낮은 생산성, 잦은 파업과 임금-물가 악순환(스태그플레이션)에 만성 재정·경상수지 불안까지 겹친 상태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영국병(病)이라고 칭했다. 결국 영국은 1976년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까지 받았다.
전문가들은 지금 영국이 그때와 판박이처럼 닮았다고 했다. 영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팬데믹 이전 2019년까지 12년간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연 0.4%에 그쳤다. 민간 투자는 주요 7개국(G7) 가운데 최하위다. 여기에 2021년 발효한 브렉시트는 장기 생산성을 4%포인트 낮췄다. 영국 싱크탱크 정책연구센터(CPS)는 최근 보고서에서 “현재 성장률 추세라면 영국 경제 규모가 두 배로 커지는 데 41년, 비관적으로 보면 58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1987~2007년 26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성장 엔진이 거의 멈췄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현재 영국을 “저성장, 저생산성, 저임금 경제에 고지출, 고세금, 고부채 국가”라고 규정했다.
영국 정부 씀씀이는 현재 예산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불어났다. 고령화에 따른 연금과 의료비 같은 복지 지출이 늘어난 탓이다. 2010년 6870억 파운드(약 1300조원)였던 정부 지출은 2024년 1조 3350억 파운드(약 2500조원)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늘어난 지출은 고스란히 빚으로 쌓였다. 영국 예산책임처(OBR)는 이대로 정책을 유지하면 현재 국내총생산(GDP) 기준 100%에 육박하는 정부 부채 비율이 50년 안에 270%를 넘어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맨해튼 연구소의 제시카 리들 선임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영국 경제는 고령화 사회가 요구하는 복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결국 부채 급증과 높은 이자율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정부는 현재 이자로만 매년 1000억 파운드(약 170조원) 이상을 쓰고 있다. 국방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막대한 금액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영국 장기 차입 비용이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높다”며 “영국 인플레이션율(3.8%)이 G7 중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국 국채를 사줄 큰손들도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과거 영국 국채 주요 매수자였던 연기금과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더 이상 자국 국채를 사들이지 않는다. 영란은행은 오히려 양적 긴축(QT)으로 가지고 있는 30년 만기 길트를 매년 1000억 파운드 규모로 줄이고 있다. 국채 공급은 넘쳐 나는데 수요가 마르면서 금리 상승을 부채질하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영국이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고 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제라드 라이언스 CPS 연구위원은 “재정 위기는 실재하는 위험으로, 1976년과 같은 사태가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정부가 투자자들 신뢰를 잃으면 위기는 언제든 닥칠 수 있다”고 했다.
레이첼 리브스 영국 재무장관은 오는 11월 26일 발표할 새 예산안에서 수십억 파운드 규모로 구멍 난 재정을 메워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증세나 재정 긴축 모두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동반한다. 전문가들은 신(新)영국병에 걸린 영국 경제가 대규 모 예산안 수정으로 개선의 발판을 마련할 지, 아니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지 지켜보고 있다.
리처드 베이커 퍼벤트자산운용 설립자는 “영국은 과도한 복지 시스템을 개혁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대신, 세금으로 부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손쉬운 길을 택하고 있다”며 “이런 방식은 경제 성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