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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시각] 금융노조에서 초(超)기업 교섭의 미래를 봄
조선비즈
각 은행 노조의 상급단체인 금융노조의 산별교섭의 형태는 수년간 이런 식이다. 1. 금융노조는 경영진으로 구성된 사용자측에 높은 임금 인상과 근무 시간 단축을 요구한다.(노조는 올해 산별교섭 초반 임금 7.1% 인상과 주 4.5일제 도입을 요구했다.) 2. 당연히 사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노조는 몇차례 협상을 진행하다 결렬을 선언하고 총파업을 추진한다. 3. 총파업을 목전에 두고 사측은 노조 요구를 대폭 수용하면서 타협점을 찾는다. 보통 3단계에서 끝나지만, 4. 총파업을 강행한다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렇게 금융노조는 2022년 총파업을 단행했고, 이달 26일에도 총파업에 나선다.
이런 교섭 방식을 반복하는데, 이를 책망하는 이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금융노조와 연대 중이고, 국민의힘은 무관심이다. 여야 모두 정권을 잡으면 금융권은 그저 ‘돈 나올 구멍’이다.
은행 경영진이 이런 교섭 방식에 끌려다니는 것은 금융노조가 대형 권력단체가 됐기 때문이다. 금융노조는 오랜 기간 1조합원 1당적 갖기, 1인 1후원 등의 운동을 펼치며 정치권 영향력을 확대했다. 노조 내 정치위원장이란 직책을 아예 따로 두고, 매 선거 때마다 민주당과 정책 연대를 하고 있다. 이런 영향으로 정계 진출한 인물도 많다. 현역 중 박홍배 민주당 의원이 금융노조 위원장 출신이다. 이재명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이며, 측근 그룹 7인회 중 한명인 김병욱 비서관도 금융노조에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했다. 민주당 상임고문인 이용득 전 의원,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영주 전 의원, 김기준 전 의원도 금융노조 출신이다. 이정도 금배지를 배출하는 단체도 드물다. 국회로 진출한 금융노조 출신 정치인들이 노조에 힘을 실어주면서 노조의 협상력도 커지고 있다.
초기업 단위 교섭의 본래 목적은 원·하청 격차 완화다. 취지에 공감하지만, 경영계 우려는 크다. 우선 ‘힘센 노조’를 가진 산업군만 높은 임금을 받는 임금 불균형이 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직원 1인당 평균 근로소득은 1억1490만원이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표 대기업보나 높은 보수를 받는다. ‘힘센 노조’ 덕분이다.
노동계는 초기업 단위 교섭을 하려면 산업별로 표준화된 임금 체계 마련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근로 형태가 기업마다 달라 임금을 표준화하기 어려울 뿐더러, 근속 연수에 따라 자동으로 임금이 올라가는 체계가 굳어질 우려도 있다. 근속 연수에 따른 임금 인상은 은행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은행권엔 ‘성과가 낮아 승진을 못한 고연차 차장이 지점장보다 연봉이 많더라’는 전설같은 일화들이 많다. 이를 타파하려고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은행권 성과연봉제 도입을 시도했으나, 금융노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다 같은 해 ‘국정 농단 사태’가 시작되면서 성과연봉제는 동력을 잃었다.
초기업 단위 교섭을 하고 각 기업마다 개별 교섭을 해야 하는 ‘이중 교섭’ 문제도 있다. 기업 입장에선 두번 교섭을 하는 셈이다. 금융노조 산별교섭이 바로 이런 구조다. 은행권은 대체로 산별교섭에서 정한 협상 내용을 이행할 여력이 있다. 그러나 초기업 단위 교섭안을 따를 능력이 없는 중소기업의 경우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런 문제로 대표적 산별교섭 중심 국가인 프랑스는 기업별 교섭 확대를 추진하고 있고, 스페인도 산별교섭을 기업별 교섭으로 전환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초기업 단위 교섭을 추진하면 해당 산업군은 모두 금융노조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가장 성공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결국 초기업 단위 교섭이 시작되면 정권이 바뀌어도 이를 되돌릴 수 없다. 경영인들은 금융노조를 보며 이미 예견된 미래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정부는 금융노조가 민심과 괴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금 은행의 역대급 실적은 은행원의 노력이 아닌 고금리와 주택 가격 상승에 따른 반사이익일 뿐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은행이 “이자 장사에 매달린다”고 지적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덜 일하고 더 받겠다고 매년 총파업을 벼르니 국민의 분노를 산다. 초기업 단위 교섭은 이렇게 대중과 멀어진 노조의 양태를 전(全) 산업군에 이식하는 행위다.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뻔히 보이는 미래를 외면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