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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왕국' 삼성을 떠나는 인재들


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 CTO 반도체연구소 차세대 연구실 담당 임원이던 대만 TSMC출신 린준청 부사장이 2024년 12월 31일 계약 만료로 퇴사했다.
린 부사장은 반도체 패키징 전문가로 꼽힌다. 1999년부터 2017년까지 대만 TSMC 재직 당시 미국 특허를 450개 이상 출원, 3차원(D) 패키징 기술의 토대를 마련한 인재다. TSMC에 합류하기 전에는 미국 메모리 반도체 회사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서 일했다. 삼성전자는 2022년 반도체 패키징 역량 강화를 위해 그를 고위직으로 영입했다. 그의 영입과 함께 어드밴스드패키징(AVP) 사업팀을 신설했다.
파운드리 사업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2011년 TSMC에서 핀펫 공정 대가로 꼽히던 양몽송(량멍쑹) 전 부사장을 영입했으나 그 역시 4년 만인 2015년 퇴사했다. 그는 14나노 핀펫 기술 개발에 기여하며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17년 중국 최대 파운드리기업 SMIC로 이직했다. 그의 이탈은 치명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에서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부문에서 5년차 이상 허리급 이상 인재 이탈도 삼성 내 심각한 고민거리로 꼽힌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SK하이닉스를 비롯해 미국 마이크론, SMIC 등 중국 반도체 업체의 공격적인 인재 모시기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해외 기업은 연봉 3배 인상, 거주비 지원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있다.
안정 추구·경직된 조직문화가 이탈 원인
미래 먹거리로 급부상한 인공지능(AI) 인재도 이탈 상황이 심각하다.
IBM과 인텔 출신 슈퍼컴퓨터 전문가 로버트 위즈네스키 부사장은 영입 2년 만인 2024년 삼성전자를 떠났다. 25년간 슈퍼컴퓨팅과 소프트웨어 설계 경력을 쌓아온 그는 2022년 4월 삼성전자로 영입돼 종합기술원 산하 미국 시스템 아키텍처 연구소를 총괄하며 고성능 컴퓨팅과 AI 분야 첨단 반도체 개발을 주도했다.
이재용 회장이 '뉴 삼성 비전'을 발표하며 영입한 1호 인재로 알려진 세바스찬 승(승현준) 삼성리서치 글로벌 연구개발(R&D) 협력담당 사장도 2024년 3월 퇴사했다. 그는 2018년 삼성리서치에서 연구개발을 총괄해오다 2020년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6년 재임기간을 끝으로 지난해 미국 프리스턴대로 복귀했다.
승현준 교수와 함께 영입된 S급 인재인 다니엘리 삼성전자 글로벌AI 센터장도 AI 연구 역량 강화 목적으로 영입됐지만 5년째 되던 2023년 3월을 끝으로 보직을 내려놨다. 그는 당시 삼성전자에서 AI의 핵심이 될 차세대 머신러닝과 로보틱스 연구 개발을 주도했다.
삼성전자 음성인식 AI 비서 '빅스비' 개발에 기여했던 우경구 삼성전자 AI센터 개발 그룹장 역시 삼성을 떠나 2022년 4월 한화에 새 둥지를 틀었다. 미국 AMD에서 영입한 마이클 고다드 오스틴연구개발센터(SARC) 소장 역시 2022년 5월 삼성을 떠났다.
삼성전자의 인공지능 기술 핵심 연구임원으로 영입돼 빅스비 개발을 주도했던 래리 헥 북미 AI센터장 전무 역시 2017~2021년 4년간의 임기를 끝으로 삼성을 떠났다. 인도 출신 최연소 천재 과학자인 프라나브 미스트리 삼성리서치 아메리카 싱스탱크 팀장을 비롯해 북미 TV 및 휴대폰 1위 달성에 기여한 삼성전자 1호 외국인 임원인 데이빗 스틸 부사장도 2021년 삼성과 인연을 정리했다.
단기성과 강조가 조직의 관료화 심화시켰나
전문가들은 혁신을 위한 명확한 비전과 방향성 부재, 경직된 내부 조직문화, 낮은 처우 등이 인재 이탈을 부추기는 주 원인으로 꼽았다. 또 조직의 자율성과 유연성을 강조해온 이건희 전 선대회장과 비교해 이재용 회장 체제에선 단기성과를 강조하는 모습도 이유로 꼽힌다. 조직의 경직성과 관료화 심화됐다는 평가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1차적 요인은 해외 대비 낮은 처우가 문제다"라며 "또한 이건희 선대 회장 때만 해도 삼성은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말랑말랑한 조직이었으나 세계 1등 지위에 오래 머물면서 이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매몰돼 변화보다는 안정을 선호하는 관료적 조직 문화가 팽배해졌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삼성이 외부 혁신과 신기술을 배척하는 NIH(Not Invented Here) 신드롬에 빠져 조직간 의사소통과 혁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봤다.
김 교수는 "삼성 경영진은 우리가 세계 1등이고, 우리는 혁신을 다 해봤고, 이 지위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있어 자유로운 사고를 하기 어려워진다"며 "명확한 방향성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사고가 팽배하면 어떤 뛰어난 사람이 이곳에서 오래 일하고 싶겠는가. 최고 경영진부터 생각을 바꿔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한다"라고 제언했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성과라는게 열심히 했지만 실패할 수도 있는데, 삼성은 실패했을 경우 아웃풋이 나올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하다"며 "과거 이건희 회장은 '뛸 사람은 뛰고, 걸을 사람은 걷고, 쉬었다 갈 사람은 쉬어라. 대신 다른 사람의 뒷다리만 잡아당기지 말아라'란 말을 다시 상기해야한다. 빨리 결과물이 나와야한다는 조급함을 유지하면 직원들에게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작용해 경직된 조직문화를 만들게 된다"고 말했다.
오 소장은 이어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이 주된 경제 기반인만큼 결국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중요한 자원이다"라며 "똑똑한 1명이 계속 이어나오는게 기술 혁신에 매우 중요하다. 또 보신주의 문화를 배척해야하고,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고 권장하는 조직문화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선율 기자
melody@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