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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위반하면 ‘처단한다’는 포고령… “국민 겁주고 정부 실책 덮으려는 것”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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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무장 계엄군이 국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무장 계엄군이 국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 제1호에 ‘처단’이라는 표현이 두 차례 등장했다. 이에 대해 서울 양천구에 사는 주부 오모(64)씨는 “처단이라고 하니 굉장히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느낌을 받았다”며 “북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국어사전에는 처단이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으로 정의돼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강한 어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반역자를 처단한다’ ‘변절자를 처단하겠다’ 등으로 쓰이는 경우 ‘죽인다’ ‘사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황선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도 “처단은 법령에 해당하는 포고령에 쓰기에는 굉장히 강도가 높은 표현”이라며 “과거 폭력적인 사태에 자주 등장했던 단어다 보니 사전적 의미보다 역사적 맥락에서 거부감과 공포감이 더 큰 말”이라고 밝혔다.
지난 3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과 1980년 5월 17일 계엄포고령 제10호
지난 3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과 1980년 5월 17일 계엄포고령 제10호

◇계엄포고령에 ‘처단’ 표현 두 차례 등장… 과거에도 쓴 적은 있어

계엄 포고령에는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일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항목이 포함됐다. 또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에 따라 처단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과거에도 계엄 포고령에 처단이라는 표현이 쓰인 적은 있다. 이번과 같은 비상계엄 포고령에서 처단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총 3차례다. 지난 1960년 4·19 비상계엄 당시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포고령 1호와 9호에서 각각 ‘이상의 위반자는 의법(依法) 엄중 처단한다’고 한 바 있다. 또 1979년 10·26 당시의 비상계엄에서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고 했다.

◇ 법률 전문가 “처단은 굉장히 권위적이고 국민을 겁주는 표현”

그런데 계엄 포고령의 근거가 되는 상위법인 계엄법에는 처단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 1949년 법 제정 이후 12차례 개정되는 동안에 처단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처단은 넓게 해석하면 ‘목을 쳐 처벌한다’는 취지로 ‘사형에 처한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며 “법령에 처단과 같은 표현을 마구잡이로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적으로는 ‘처벌’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구체적인 처벌의 정도를 써야 했다”고 했다.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처단한다’가 아니라 ‘처벌한다’라고만 쓰면 된다”며 “계엄령이 위급한 상황에서 쓰이는 수단이긴 해도, 그 본질은 국민을 보호하려는 것인데 처단 같은 용어를 쓰면 안 된다”고 했다. 이어 “처단은 법치국가에서는 쓰지 않는 굉장히 권위적이고 겁을 주는 표현”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형법학자는 “(이번 계엄 포고문에서 처단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처벌을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지난 1960~1970년대 계엄령 당시 썼을 표현을 그대로 옮긴 느낌이 든다”면서 “시대 변화와 국민 수준에 맞지 않은 표현”이라고 말했다.

◇ “의료인 범죄자 취급하면서 정부 실책 덮으려는 것”

이번 계엄 포고령에서 특히 의료인을 상대로 처단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한 의사는 “윤석열 정부의 최대 실책 중 하나가 의대 정원 증원 강행에서 촉발된 의료계 파업인데 포고령이 처단 대상으로 의료인을 정조준했다”면서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의료인을 범죄자 취급하면서 처단하겠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특히 느닷없이 의사들에게 ‘처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준비되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느낌을 줬다”면서 “군부 독재 시절이 연상될 뿐 아니라 적절치도 않았다”고 말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처단은 범죄자를 대상으로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국민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라며 “의사도 국민도 국가 전복 세력이 아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모인 시민들이 출입을 막고 있는 경찰 병력에게 국회 개방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모인 시민들이 출입을 막고 있는 경찰 병력에게 국회 개방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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