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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 한 올, 표정 하나까지 살아 있는 유인원…영화 '혹성탈출 4'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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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유인원이 인간 지배하는 세상…영상미·정교한 CG 돋보여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벼랑 끝에 서 있는 침팬지 노아(오언 티그 분)가 반대편 절벽 꼭대기에 놓인 독수리알을 발견한다.

쇠막대기를 집어 든 그는 "너무 멀어 위험하다"며 말리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둥지를 향해 뛰어든다. 막대기를 피켈 삼아 암벽 타기하듯 절벽을 오른 그는 알을 향해 손을 쭉 뻗는다. 순간 발이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떨어지지만, 가까스로 덩굴 하나를 잡고 목숨을 건진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노아의 얼굴에는 흥분과 불안, 공포, 안도, 환희 같은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8일 개봉한 웨스 볼 감독의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이하 '혹성탈출 4')에서 진화한 유인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혹성탈출' 리부트 3부작 마지막 편 '종의 전쟁'(2017) 이후 7년 만에 나오는 신작인 이 영화는 인류가 바이러스로 인해 몰락한 지 몇 세기가 지난 때를 배경으로 한다.

극 중 유인원들은 청동기쯤의 인간 수준으로 진화해 말로 소통하고 가까운 종족끼리 정착 생활을 한다.

반면 인간은 퇴화를 거듭하면서 언어능력마저 상실했다. 인류가 이룩한 찬란한 문명도 모두 사라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인간은 언제 유인원들에게 잡힐지 몰라 불안에 떠는 신세다. 지구의 주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한때 인간이 동물원에 가둬두고 구경하던 유인원이다.
영화는 전편에서 유인원들을 새로운 터전으로 안내하고 죽음을 맞은 시저의 장례식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로부터 약 300년 뒤 스스로를 시저라 칭하는 프록시무스(케빈 듀랜드)가 나타나 정복 전쟁 끝에 제국을 세우고 왕이 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인간을 사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하는 그는 옛 인류의 기술을 이용해 자기 세계를 발전시키려 한다.

프록시무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가 주인공 노아다. 그는 우연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시저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후 인간 소녀 노바(프레이아 앨런)를 만난다.

노아와 노바가 프록시무스 군단에 맞서 자유를 좇아가는 여정이 이야기의 큰 줄기다.

리부트 3부작이 인간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시저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했다면, 이번 작품은 애송이 유인원 노아가 모험 끝에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성장담에 방점을 찍었다.

기본적인 설정이나 캐릭터는 1968년 개봉한 오리지널 '혹성탈출'을 떠오르게 한다. 유인원이 말을 타고서 그물로 인간을 잡는 장면도 본편을 오마주한 것이다.

그러나 영상미는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이다.

인류 종말 후 세계를 상상하면 회색빛 폐허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이 영화는 푸른 자연에 둘러싸여 정글처럼 변한 빌딩 숲을 스크린에 펼친다. 노아의 모험을 따라가는 동안 흡사 자연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 같은 광경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된다.
놀라운 점은 영화의 배경 대부분이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현된 가상 세계라는 것이다. 전체 러닝타임의 35분가량은 '올 CG'로 이뤄졌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이파리 하나까지 모두 가짜다.

유인원들의 표정이나 행동 역시 더 정교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인형 탈' 수준이던 1968년작은 물론이고 2017년작에 비해서도 훨씬 다양한 감정을 전달한다.

배우들이 특수 수트를 착용한 채 연기한 뒤 여기에 유인원들의 모습을 덧씌우는 퍼포먼스 캡처 기술을 활용했다. 인간의 미묘한 표정 차이까지 포착할 수 있는 최첨단 시각특수효과(VFX) 기술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유인원이 지배하는 세상에 이질감을 거의 느끼지 않고 빠져들 수 있다. 말을 타고 모험을 떠나는 침팬지, 왕관을 쓴 채 동족을 짓밟는 보노보, 가르침을 주는 현명한 오랑우탄 등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는 힘도 자연스러운 CG에서 나온다.

특히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격납고에서 유인원들이 허우적대는 시퀀스는 감탄을 자아낸다. 수중에선 털이 한올 한올 세워지고, 밖에서는 흠뻑 젖은 털끝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은 도무지 가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바타: 물의 길'(2022) 제작에 참여한 VFX 기업 웨타FX의 노하우가 만들어낸 장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는 즐거움에만 치중한 작품은 아니다. '혹성탈출'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이번 편에서도 유효하다.

관객들은 유인원들과 지배·피지배 관계가 뒤바뀐 영화 속 세계를 경험하면서 '인간은 다른 종과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곱씹게 될 듯하다. 유인원과 인간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노아는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볼 감독은 앞서 국내 언론과의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유의미한 메시지를 주는 영화"라며 "이 같은 '혹성탈출'의 유산은 이어받되 완전히 새로운 챕터를 열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혹성탈출' 4편은 노아를 주인공으로 한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노아의 모험과 성장은 5∼6편에서도 이어진다.

145분. 12세 이상 관람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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